거석기념물

거석기념물

[ 巨石記念物 ]

거석기념물이란 지석묘(dolmen) 등의 거석무덤(megalithic tombs), 선돌(menhir), 석렬(石列, stone alignments), 환상석렬(stone circles), 그리고 헨지유구(henge monument)와 같은 자연경관 위에 세워진 선사인(先史人) 또는 고대인(古代人)에 의하여 세워진 거석으로 만든 축조물을 일컫는다.

거석기념물의 출현시기는 프랑스의 브리타니(Brittany)지역으로 가장 빠른 유구는 방사성동위원소 측정결과 B.C. 5000년대 초기로 나와 있는데 영국의 경우도 빠른 것은 이에 많이 뒤지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영국의 경우 B.C. 4000년기에서 3000년기의 신석기시대에 주로 거석기념물이 축조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영국은 스톤헨지(Stone Henge), 에이브베리(Avebury) 환상석렬, 칼라니쉬(Callanish) 환상석렬, 오크니제도(Orkeny Islands) 스테니스(Steness) 거석유구와 브로드가 거석유구(Ring of Brodgar), 웨스트 케네트 長墳(West Kennet Long Barrow)이 거석기념물로 유명하고, 아일랜드의 뉴그란지 석실무덤(the passage tombs at Newgrange) 등이 프랑스의 경우 카르낙(Carnac)거석 유적이 대표적 거석기념물이다.

한국의 거석기념물은 대체로 지석묘나 선돌이며 지역에 따라 출현시기와 종말시기에서 약간의 시차는 있으나 대체로 청동기시대인 B.C. 10세기에 출현하여 철기시대전기(초기철기시대)에 속하는 B.C. 3∼2세기경에 사라지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사실 연구자의 시각에 따라 지역별로 지석묘의 상한연대와 하한연대에 차이가 있다. 어떤 연구자는 지석묘의 상한연대를 B.C. 1500년경까지 올려다보기도 하며 지석묘가 축조되는 하한연대도 제주도의 경우는 기원 이후까지 내려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지석묘는 B.C. 1500년경부터 기원후까지 약 1500년에 걸쳐 한반도에서 사용된 묘제라는 말이 된다.

거석기념물로서의 지석묘는 무덤의 하나이다. 한반도에서 확인된 지석묘는 약 30,000여 기에 달해서 동북아시아에서는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한국에서는 특히 전남지방에 19,000여 기가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지석묘는 우리나라 인근의 요동반도와 산동반도에도 일부 분포되어 있고 일본의 북구주에도 분포되어 있으나 시베리아에는 지석묘가 분포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인도네시아, 인도, 그리고 서부유럽 등지에도 분포되어 있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특히 구대륙에 넓게 분포하고 있는 지석묘를 서로 관련시켜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그러므로 한국 지석묘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으나 인도네시아나 인도 그리고 서구 유럽의 지석묘들과는 관계없이 자생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지석묘는 연구자에 따라 서로 다른 분류기준이 있을 수 있으나 구조에 따라 탁자식(오덕리형, 북방식), 기반식(바둑판식, 남방식), 개석식(침촌리식), 묘표식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지석묘안에서는 주로 석촉, 석검, 홍도류가 나오고 관옥, 무문토기 등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지석묘는 주로 하천변의 자연제방이나 충적대지 그리고 구릉이나 산이 평지와 만나는 지점 등에 2∼3기 또는 대규모로 열을 지어 20∼30기, 경우에 따라서는 그보다도 많이 집단을 이룬 상태로 발견되기도 한다. 지석묘 중에서도 창원 덕천리 지석묘의 경우는 인위적으로 축조된 묘역이 확인되었고 대구 진천동 입석 유구의 경우에도 주변에서 석관묘가 발견되어 묘역과 의례영역이 결합된 거석유구도 있음이 확인되었다. 지석묘를 축조하거나 축조한 후에도 장송의례나 조상숭배의례, 또는 집단의 단합과 안녕을 기원하는 여러 의례도 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김천 송죽리 지석묘의 경우에서는 비파형동검이 지석묘 앞에 꽃인 채로 발견된 바 있고, 여수 오림동 5호 지석묘와 포항 인비리 16호 지석묘의 상석에는 암각화가 그려져 있고 지석묘의 상석에 성혈이 있는 경우도 있으며, 대구 상동 1호 지석묘의 매장주체부 서장벽 부위에서는 반원형의 돌무지시설이 확인되었는데 이 돌무지에 불을 맞은 흔적이 있어 지석묘와 관련된 어떤 의례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선돌(立石)은 구릉 위에나 평지에 세워져 있는 입석으로 청동기시대 신앙과 의례와 관련된 기념물로 여겨지고 있다. 선돌 중에도 대구 진천동의 입석의 경우처럼 입석 위에 성혈이 새겨져 있고 입석은 장방형기단의 중심부에 있다. 그리고 그 기단의 바깥에는 석관묘 3기가 확인된 바 있다. 선돌은 발굴된 경우가 많지 않아 청동기시대 선돌의 축조방식상의 특성이 그리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이나 앞으로 이에 대한 자료를 축적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한 선돌 주변의 유구와 출토유물과 채집유물에 대한 보다 종합적인 자료수집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지석묘와 선돌 등과 같은 거석기념물은 우리나라의 경우 청동기시대에 주로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거석기념물은 아마도 농경의 본격화와 집단영역의 표시 그리고 집단의 단합을 꾀하거나 집단 우두머리(首長)의 권위를 높이는 방법의 하나로 축조되고 유지되면서 그와 관련된 각종의례가 행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대구 상동지석묘 발굴조사 보고서(국립대구박물관·대구광역시 수성구, 2000년)
  • Archaeology : Theories, Methods and Practice-Third Edition(C.Renfrew and P.Bahn, (London) Thames & Hudson, 2000년)
  • 한국 지석묘(고인돌)유적 종합조사·연구(문화재청·서울대학교박물관, 1999년)
  • 耽羅 歷史와 文化(濟州史정립사업추진협의회, 1998년)
  • 한국선돌의 기능변천에 대한 연구-충청지역 선돌을 중심으로(한규량, 백산학보 28, 198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