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도자기

한국의 도자기

한국의 토기

한국의 토기

한국 도자기의 역사는 약 4000년 전 북방으로부터 집단으로 이동해와서 생활하기 시작한 토착민부터 시작되었으며 삼국시대에는 토기가 발달하여 생활화되었다. 이때부터 일반 생활용기 뿐만아니라 기와 등에까지 문양를 넣어 제작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토기는 기형이 세련되고, 도장무늬[印花文] 위에 연유(鉛釉)의 변화가 있는 유색(釉色)의 도자기로 발전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도자기 문화가 한층 더 발전하게 되면서 고려청자가 만들어졌다. 고려에 융성한 불교는 뛰어난 문화예술을 낳은 모체가 되었으며, 삼국과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토기에서 벗어나 자기(瓷器)를 만드는 시대로 접어든다. 이는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시도된 연유계의 시유도기(施釉陶器)와 회유계(灰釉系)의 시유도기의 영향이 컸다. 이 무렵에 중국의 청자기술이 한반도에 전파되었다고 추측된다.

중국 황허강[黃河] 유역의 북방계 청자기술이 서해 연안 중부지대에 전파된 것으로서 인천 경서동, 충청남도 보령·서산 지방에 분포된 산화소성(酸化燒成) 또는 중성소성(中性燒成)으로 보이는 조질(粗質) 청자요지가 그 계류이고, 또 하나는 중국 남부 항저우만[杭州灣] 연안의 웨저우요계의 환원소성(還元燒成) 청자기술이 남부 서해의 전통적인 고대 한국-중국 문화 교통로를 통하여 10세기 전반기에 남부 지방인 전라남도 강진, 전라북도 부안 등지에 전파·확산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시작된 고려자기의 발달은 10세기 말에 이르는 동안 제조기술이 발달되어 청자류와 함께 환원소성에 의한 백자기술이, 한편에서는 신라 이후의 회청색 토기들과 경질회유(硬質灰釉)와 연질연유(軟質鉛釉) 등이 꾸준히 양산되었다. 고려시대의 도자기는 토기·청자기·백자기, 연유에 의한 유색(有色) 도기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된 시기였다.

11세기까지는 중국 웨저우요의 양식이, 11세기 말엽부터는 룽취안요[龍泉窯]의 기형과 유조(釉調)가 크게 영향을 주었으며, 북방계의 딩저우요[定州窯], 루주요 등의 기형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시대에는 주로 환원소성을 하였고, 중국식의 청자 유색 ‘비색(秘色)’을 고려에서는 ‘비색(翡色)’이라고 할 만큼 유색에 대한 관심과 자신을 가졌다. 12세기에 접어들면서 순청자시대가 물러나고 상감(象嵌)청자의 기법이 개발되면서 그 양상이 급변하였다. 상감은 고려인 스스로가 착안한 독창적인 문양기법이며, 고려청자를 세계적인 문화재로 만든 도자기 기술이다. 이 기법은 거의 1세기 동안 전성시대를 이루었으며, 가장 뛰어난 고려청자가 제작되었다. 하지만 1231년 몽골이 침입하자 조정은 40년 간이나 강화도로 천도하였으며, 민정이 소연한 속에 고려가 원나라의 영향하에 있으면서 상감기법을 비롯하여 비취색과 선을 잃고, 서서히 실용성과 안정감을 보이면서 변모하여갔다. 14세기 말 고려의 망국에 이르기까지 청자는 국운과 함께 퇴조하였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청자의 유연한 곡선은 단조롭고 둔해졌으며, 기벽이 두껍고 투박해졌다. 무늬 역시 단순화되면서 섬세하던 상감무늬 대신 기능적인 도장무늬로 변하고, 산화된 소색(燒色)은 그대로 분청자기의 색을 보여주었다. 즉 조선자기의 전신은 고려 말기의 청자임이 분명하나, 조선자기와 고려자기는 너무도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첫째, 고려자기의 생산지는 규모가 큰 관요(官窯)가 4군데, 나머지 소규모의 민요(民窯)가 70여 개소 정도로 전역에 걸쳐 산재해 있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이미 초기에 전국에 걸쳐 수백의 각종 도자기가마가 있었음을 《세종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전국의 자기가마 136개소와 도기가마 185개소가 기록되어 있다(생산되는 질과 양을 상·중·하로 구분하였다).
둘째, 고려의 도자기는 초기부터 말기까지 청자가 주류였음에 비하여, 조선시대의 도자기는 처음부터 분청사기와 백자기가 함께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고려자기나 조선자기에는 제조된 곳을 알리는 명문이 들어 있는 것이 있다. 고려자기의 경우 관사명(官司銘)이 들어 있는 것은 모두가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에서 소성된 것으로, 수효가 극히 적고, 후기의 것인 데 반하여, 조선자기의 경우에는 초기부터 중앙관요는 물론 중요 관사명과 소성한 지방명이 분명히 새겨져 있으며, 그 종류가 다양할 뿐 아니라 수효도 수천에 달한다. 조선자기는 왕실이나 사가에서 쓰는 의기(儀器)와 제기(祭器)의 제작 등 기종과 성격이 명백하였다. 사선서(司膳署)라는 기관을 따로 두고, 경기도 광주(廣州)의 중앙관요와 각 지방관요를 직접 관리할 만큼 국가적이었다. 후에 사옹방(司甕房)으로, 다시 1467년(세조 13)에 사옹원(司甕院)으로 개칭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민요로 바뀌면서 모든 기능은 자연히 마비되고 말았다.
넷째,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분청사기와 백자기가 주류를 이루었다. 임진왜란으로 재정은 고갈되고 도자기가마도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뛰어난 도공들이 일본으로 납치되었다.

이러한 수난의 시기를 지나자 색(色)을 절제하고 소박하며 큼직한 순백의 자기를 탄생하게 되었으며 그 형이 지극히 서민적이면서 조선백자의 독특한 분위기의 도자기를 생산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도자기는 고려 말 퇴락된 청자의 맥을 이은 조선청자와 청자에서 일변한 분청사기, 초기의 고려계 백자, 원(元)·명(明)계 백자, 청화(靑華)백자의 영향으로 발달된 백자가 있고, 이 밖에 흑유(黑釉)·철채(鐵彩)·철사유(鐵砂釉) 등이 있으나 대별하여 분청사기와 백자기로 구분한다.
 

하지만 또다시 일제강점기하에서 한국의 도자기는 퇴보하였고, 기형은 지극히 평범하여 자연히 기교가 없어졌으며, 시유방법까지 간편한 방법으로 처리하여 그야말로 막사발의 분위기가 역력한 그릇이 되었다. 그러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막사발들은 조선시대와 현대의 도자기를 이어 주는 가교역할을 하였다.

8·15광복6·25전쟁을 겪는 동안 크게 발달하지 못한 한국의 도자기 공업은 60년대를 시발점으로 급속히 진전되어 현대적 공장이 속속 건설되고, 국내 수요는 물론 수출산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현재에는 전통적인 도자기 기법이 다시 복원되어 현대화된 도자기로 재탄생되었으며 국책산업으로 지정 육성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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