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사기

분청사기

[ 粉靑沙器 ]

요약 회색 또는 회흑색 태토(胎土) 위에 백토니(白土泥)를 분장한 다음 유약을 입혀서 구워낸 자기.
풀꽃무늬 대접

풀꽃무늬 대접

분청사기란 말은 1930년대 고유섭(高裕燮:1904~1944)이 당시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미시마[三島]’란 용어에 반대하여 새롭게 지은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약칭(略稱)이다.

퇴락한 상감청자(象嵌靑瓷)에 그 연원을 두는 이 사기는 14세기 후반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조선왕조의 기반이 닦이는 세종연간(1419~1450)을 전후하여 그릇의 질(質)이나 형태 및 무늬의 종류, 무늬를 넣는 기법[施文技法] 등이 크게 발전 ·세련되어 그 절정을 이루게 되었으며, 조선 도자공예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15세기 후반부터 경기 광주 일대에 백자(白瓷)를 생산하는 관요(官窯)가 운영되면서 왕실과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자기의 공급은 광주분원(廣州分院)에서 맡게 되자 관장제수공업체(官匠制手工業體)로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분청사기의 생산은 점점 소규모화되면서 민간용을 주로 생산하게 되었다. 더욱이 중앙관요의 영향이 지방으로 파급되면서 백자의 생산이 계속 증가되었으며, 16세기 중엽 이후에는 분청사기의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백자만이 남아 조선시대 도자기의 주류가 되었다.

분청사기의 특징은 청자나 백자에서는 볼 수 없는 자유분방하고 활력에 넘치는 실용적인 형태와 다양한 분장기법(粉粧技法), 그리고 의미와 특성을 살리면서도 때로는 대담하게 생략, 변형시켜 재구성한 무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분청사기가 유교(儒敎)의 사회기반 위에서 성장하였고 고려 이래의 불교와 함께 표면상으로는 크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지방마다 특색이 있는 전통의 영향이었다고 생각된다.

기법과 분류

분청사기는 분장과 무늬를 나타내는 기법에 따라 7가지로 분류한다. 첫째는 표면을 선이나 면으로 판 후 백토나 자토(裏土)를 감입(嵌入)해서 무늬를 나타내는 상감기법, 둘째는 무늬를 도장으로 찍고 백토분장(白土粉粧)을 한 후에 닦아내서 찍힌 무늬가 희게 나타나는 인화기법(印畵技法), 셋째는 분장 후 무늬 이외의 백토를 긁어내 태토의 어두운 색과 분장된 백색을 대비시켜 무늬를 표현하는 박지기법(剝地技法), 넷째는 분장 후 선으로 무늬를 새기는 조화기법(造花技法), 다섯째는 분장 후 철분(鐵分)이 많은 안료(顔料)로 무늬를 그리는 철화기법(鐵畵技法), 여섯째는 귀얄로 분장만 하는 귀얄기법, 일곱째는 백토물에 담가서 분장하는 덤벙기법이다. 이들 각각의 기법들은 시대성과 지역성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기별 구분

분청사기는 크게 4시기로 구분된다. 전기(발생기:1360~1420)는 고려청자 상감무늬의 퇴화된 여운과 그 변모 및 인화기법(印畵技法)이 발생한 시기이고, 중기(발전기:1420~1480)는 상감·인화·조화(造花)·박지(剝地) 등 다양한 기법의 분청이 생산된 시기이며, 후기(쇠퇴기:1480~1540)는 상감·인화 기법의 쇠퇴하고 철화(鐵畵)·귀얄·덤벙분청이 성행한 시기이며, 말기(소멸기:1540~1600)는 귀얄·덤벙분청이 소멸된 시기이다.

분청사기에는 1417년(태종 17) 호조(戶曹)에서 관물(官物) 도용(盜用)의 폐단을 막고자 상소한 내용에 의거 분청사기를 사용한 관청이나 그 제작지 등에 관한 명문(銘文)이 있는 것들이 있다. 이들 관청 중에는 일정기간 존속되었다가 없어진 관청들도 있어 분청사기의 편년(編年)이나 당시 도자기의 제작양상을 파악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분청사기박지연어문편병(국보 179)·분청사기인화문태호(국보 177) ·분청사기조화어문편병(국보 178) ·분청박지화문병(보물 287)·분청사기모란문반합(보물 348) ·분청사기연화문편호(보물 268)·분청사기철화어문호(보물 787)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