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김정일

[ 金正日 ]

요약 북한의 정치가. 김일성의 장남으로 태어나 1974년 후계자로 확정되었고,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뒤 권력을 승계하였다. 이후 17년 동안 국방위원회 위원장, 조선노동당 총비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정치국 상무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0기 대의원 등의 공식 직함을 가진 북한 최고 실력자로 군림하다가 2011년 12월 17일 사망하였다.
6·15남북공동선언

6·15남북공동선언

출생-사망 1942.2.16 ~ 2011.12.17
별칭 유리 이르세노비치 김
국적 북한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러시아 하바롭스크
시대 현대

생애

1942년 2월 16일 김일성(金日成)과 김정숙(金貞淑)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지에 대해서 북한은 백두산 밀영지의 귀틀집에서 태어났다고 공식 발표하고 있으나, 구 소련하바롭스크(Хабаровск, Khabarovsk)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통설이다. 러시아식 이름은 유리 이르세노비치 김이었으며, '정일'의 한자는 원래 '正一'이었으나 아버지 이름의 한자를 따서 '正日'로 고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5년 11월 소련에서 귀국한 뒤 평양의 제1초급중학교를 거쳐 1960년 고위층 자제들이 다니는 남산고등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60년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였고, 재학 중인 1961년 7월 조선노동당에 입당하였다. 1964년 4월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뒤 같은 해 6월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이 되었으며, 1966년 호위총국에서 근무하였다.

1967년 당의 핵심 부서인 조직지도부 과장을 거쳐 1970년 당 중앙위원회 문학예술부 부부장이 되었고, 1972년 10월 당 중앙위원, 1973년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장을 거쳐 중앙위원회 조직 및 선전담당 비서 겸 조직지도부 부장, 3대 혁명 소조 운동(三大革命小組運動) 총책임자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정일은 김일성 개인숭배와 유일사상 확립을 위한 당내 사상투쟁을 주도하였고, 그를 위한 문학·예술·출판·보도 등 선전물의 관리를 담당하였다. 

1974년 2월 당 중앙위원회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당 정치위원회 위원(지금의 정치국원)이 되면서 '친애하는 동지' 또는 '당중앙'으로 호칭되면서 김일성의 후계자로 확정되었고, 1975년에는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이후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비서국 비서,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공식적인 제2인자가 되었다. 이로써 김정일은 김일성을 제외하고 당의 3대 권력기구인 정치국, 비서국, 군사위원회에 모두 이름을 올린 인물이 되었다. 이때부터 ‘당 중앙’ 대신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로 호칭이 변경되었다. 그리고 김정일 후계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새로운 인물들도 등용되었으며, 김정일 개인에 대한 우상화 작업도 진행되었다. 1982년 7월 1980년대 속도창조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생산과 건설을 약진시켜 경제 개발을 도모한 것이다. 이로써 김일성의 현지 지도는 점점 줄어들었고, 김정일의 역할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90년 5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년 12월 당 중앙위원회 제6기 19차 전원회의에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1992년에는 원수, 1993년 4월에는 국방위원장에 선출되어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한 뒤에는 바로 그 권력을 승계하지 않고, 유훈에 따라 3년 뒤인 1997년 10월 조선노동당 총비서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헌법 개정을 통해 주석제를 폐지하고 권한이 더욱 강화된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되었다. 이어 2003년과 2009년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되었고, 2010년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당 총비서, 당 정치국 상무위원, 당 정치국 위원, 당 중앙군사위 위원장, 당 중앙위 위원 등에 선임되었다.

김정일 집권기의 북한

김정일은 1991년 소련 붕괴, 1992년 한중 수교 등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변화 속에서 집권하였다. 이는 외교 방면뿐만 아니라 경제 쪽에서도 여러 문제를 야기하였다. 1990년대부터 북한은 내부 자원의 고갈과 에너지 부족 등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였고, 곧 노동 수요 감소와 배급 체제의 동요로 이어졌다. 특히 식량난은 북한에게 큰 문제였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김정일은 1997년 고난의 행군, 1998년 강행군의 구호를 내세우며 주민들을 지도하였다. 1995~1996년에 한국·중국·일본으로부터 쌀을 지원받았고, 나진선봉경제특구와 같은 외국인 투자를 장려하였다. 그러나 식량의 문제는 거주지 이탈, 체제 불응, 암시장 발전 등 국가의 대민지배 기능을 약화시켰다. 

김정일은 이러한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외강경노선을 펼쳤다. 1998년 ‘선군정치’를 공식화하여 군대를 중심으로 북한을 통치하겠다는 뜻을 드러내었다. 특히 1980년대부터 영변에 핵 시설을 건설하며 핵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북한은 소련의 제안으로 NPT(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하였으나, 1990년대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미국과 IAEA(국제원자력기구)는 북한의 핵 개발에 의혹을 제기하였고, 북한은 1993년 3월 NPT 탈퇴를 선언하였다. 김정일은 핵 개발 포기의 대가로 미국이 ‘북한 체제의 안전’과 경제 보상의 확약을 요구하였다. 1994년 10월 북한과 미국은 제네바 기본합의서를 체결하며 북한의 핵 개발 중단과 미국의 원자로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양측의 합의는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고, 미국이 대북강경책으로 선회하자 북한은 2006년 10월, 2009년 4월 제1·2차 핵 실험을 실시하였다.

대남관계

김정일은 대남 관계에 있어서 1996년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 2002년 1·2차 연평해전,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사건, 11월에 연평도 포격을 일으키는 등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반면 1998년 금강산관광을 재개하는 데 동의하였고,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에 나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6·15남북공동선언, 2007년 10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에서 10·4 남북공동선언에 합의하기도 하였다. 

후계와 사망

2008년 뇌졸중이 발병한 뒤 2009년 고영희와 사이에서 낳은 김정은(金正恩)을 후계자로 내정하였고, 2010년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되게 함으로써 후계 구도를 확정하였다. 건강이상설이 끊임없이 나도는 가운데 2011년 12월 17일 현지 지도 방문차 탑승한 열차에서 사망하였고, 이틀 뒤인 12월 19일 조선중앙방송에서 과로로 인한 중증급성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사망하였다고 공식 발표되었다. 시신은 아버지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에 함께 안치되었다.

평가

17년 동안 북한의 최고 권력자로 있으면서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에 이어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두 번째 정상회담을 하여 남북 대립의 긴장 상태를 완화시키기도 하였으나,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친 핵 실험 강행과 1999년과 2002년의 1·2차 연평해전, 2010년의 연평도 포격사건 등으로 한반도의 위기 상황을 지속적으로 고조시키기도 하였다. 또 아들을 후계자로 정함으로써 3대 권력 세습 체제를 구축하였다는 비판을 받는다.

● 북한의 최고 지도자

이 름 재임기간

제1대

김일성

1950.07 ~ 1991.12

제2대

김정일

1991.12 ~ 2011.12

제3대

김정은

2011.12 ~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