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혁명 소조 운동

3대 혁명 소조 운동

[ 三大革命小組運動 ]

요약 1970년대 북한이 사상·기술·문화 분야를 3대 혁명 과업으로 설정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젊은 엘리트를 소조 단위로 현장에 파견한 운동이다.

3대 혁명 소조 운동은 1970년대 북한이 사상·기술·문화 분야를 3대 혁명 과업으로 설정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젊은 엘리트를 소조(小組, 작은 조직) 단위로 현장에 파견한 것을 말한다. 1973년 2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정치실무적으로 준비된 당 핵심들과 청년 인텔리들”로 구성된 소조를 공업과 농업 분야에 먼저 파견하고, 이후 교육을 포함한 다른 분야로 확대하기로 결의했다. 이로부터 북한의 여러 분야에 소조들이 파견되었는데, 보통 20~30명을 단위로 했고 규모가 큰 사업장의 경우는 50명 정도를 소조로 구성했다.

3대 혁명 소조 운동이 시행된 1970년대의 북한은 해방 이후 간부였던 인물들이 대부분 나이가 들어 사회의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북한 지도부는 기존 간부들에게 보수주의, 경험주의, 관료주의, 조직 이기주의, 형식주의 등의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고 판단했는데, 이러한 문제들이 북한의 공산주의 사회 건설 혁명에 차질을 준다고 보았다. 북한 지도부가 소조의 활동을 통해 의도한 바는 구체적으로 첫째, 사람들의 의식을 공산주의적으로 개조하여 경제 성장을 도모하고 생활 문화를 재확립하는 것 둘째, 경제 활동을 하는 모든 인민들이 당의 정책을 무조건적으로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것 셋째, 김일성(金日成)과 김정일(金正日)의 지시를 인민들에게 제대로 전달하여 이해시킬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를 젊은 인텔리들을 중심으로 시행하여 위로부터의 기술 혁신을 추구하려 한 것이다.

이와 같은 3대 혁명 소조 운동은 북한이 기존 간부를 포함한 인민들의 재교육을 토대로 기술 혁신을 의도했다고 할 수 있지만, 북한의 세대 교체를 위한 작업으로도 이해된다. 즉,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이어지는 후계 구도를 원만하게 하고, 후계 체제를 공고하게 하는 행동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정일은 3대 혁명 소조 운동의 직접보고체계를 만드는 등 소조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관리했으며, 젊은 인텔리들을 사업장에 파견하여 실무 경험을 쌓게 하고 작업장과 인텔리들에게 당의 사상을 주입·전파시키고자 했다. 아울러 소조의 파견으로 기존 간부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감시·감독을 도모했다. 이는 김정일의 후계체제가 시작되는 출발점과 일치하는데, 3대 혁명 소조 운동이 당의 세대교체를 이끌어 김정일의 후계 세대를 양성한다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각 사업장으로 파견된 소조들의 적극적인 활동은 세대 및 직급 간 갈등을 야기했다. 소조들이 벌인 정보 수집과 인사 개입 등은 당 조직과 마찰을 일으켰고, 1981년 11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는 당 조직과 소조 간의 대규모 충돌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서로에게 구세대의 일선 후퇴, 미숙한 자들의 배제 등을 주장하며 공격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김정일은 소조들을 지지하였고, 김정일의 집권기에 이르러 소조들이 정치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1980년대 후반 무렵에는 소조들도 관성화되었고, 기존 간부들과의 마찰이 끊이지 않아 활동이 축소되기 시작했다. 결국 1990년대에 들어서는 3대 혁명 소조가 사라졌고, 대학 졸업자들이 실무만을 익히는 현장체험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참조항목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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