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만

장만

[ 張晩 ]

요약 조선 후기 문신. 1607년 함경도 관찰사로 누르하치의 침입을 경고하여 그 방어책을 세우도록 상소하였고, 1610년 다시 함경도관찰사가 되자 방비대책의 시급성을 역설, 중추부동지사로 호지의 지도를 그려 바쳤다.
출생-사망 1566 ~ 1629
본관 인동(仁同)
호고(好古)
낙서(洛西)
시호 충정(忠定)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낙서집》

본관 인동(仁同). 고(好古). 호 낙서(洛西). 시호 충정(忠定). 1589년(선조 22)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591년에는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승문원벼슬을 거쳐 검열 ·전생시(典牲寺) 주부를 역임하였다. 이어 형조 ·예조의 좌랑 ·지평이 되었으며, 1599년 봉산(鳳山)군수가 되었다. 1601년 도승지에 오르고 이듬해 왕후의 고주청(誥命奏請)부사로, 이어 세자책봉 주청부사로 두 차례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7년 함경도관찰사로 누르하치[奴兒哈赤]의 침입을 경고하여 그 방어책을 세우도록 상소하였고, 1610년(광해군 2) 다시 함경도관찰사가 되자 방비대책의 시급성을 역설,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 호지(胡地)의 지도를 그려 바쳤다. 그 후 형조판서, 병조판서로 대북(大北)의 난정(亂政)을 소진(疎陣)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자, 칭병(稱病)하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다시 등용되어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로서 원수부(元帥府)를 평양(平壤)에 두고 있다가,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여 진무(振武)공신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오르고 옥성(玉城)부원군에 봉해졌다. 우찬성을 거쳐 다시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1627년 정묘호란 때 적을 막지 못한 죄로 관작을 삭탈당하고 부여(扶餘)에 유배되었다가 전공(前功)으로 용서받고, 복관되었다. 문무를 겸비하고 재략이 뛰어났다. 영의정이 추증되고, 통진(通津)의 향사(鄕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낙서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