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오산리 유적

양양 오산리 유적

[ Archaeological Site in Osan-ri, Yangyang , 襄陽 鰲山里 遺蹟 ]

요약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에 있는 한반도 최고(最古)의 신석기시대 집터 유적. 1997년 4월 18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양양 오산리 유적 집터

양양 오산리 유적 집터

지정종목 사적
지정일 1997년 4월 18일
소재지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 60번지 외
시대 석기시대
종류/분류 유적건조물 / 유물산포지유적산포지 / 육상유물산포지 / 선사유물
크기 면적 약 8,000㎡

1997년 4월 18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동해안에서 내륙쪽으로 약 200m 떨어진 쌍호(雙湖)가의 사구(砂丘) 위에 있다. 1977년 쌍호를 매몰, 농지로 전용하기 위한 작업 중 석기 ·토기의 파편이 노출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그 뒤 1980년까지 서울대학교 조사팀이 6차에 걸쳐 지표조사하였고, 1981∼1985년까지 5차례에 걸쳐 8,000㎡ 중 1,000㎡에 대하여 발굴조사를 함에 따라 모두 6개의 자연층위(自然層位)가 나타났다. 이 중 유적이 극히 일부에만 있는 Ⅰ층의 청동기시대 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신석기시대에 해당한다.

Ⅰ층에서는 적갈색민무늬토기 ·덧띠토기 ·우각형(牛角形)손잡이와 함께 목탄이 채집되었으며, 이를 측정한 결과 BC 2070∼BC 1510년(수륜보정 연대)으로 밝혀졌다. Ⅱ층에서 출토된 뾰족바닥형[尖底形]토기에는 아가리에 평행밀집사단선문(平行密集斜短線文) ·사격자문(斜格子文) ·조대문(組帶文), 기복부에 생선뼈무늬[魚骨文]로 시문(施文)한 것이 많다. Ⅲ층에서 출토된 토기는 예외 없이 납작바닥형[平底形]인데, 밑바닥에는 엽맥(葉脈)이 찍힌 것이 많다. 이러한 예는 세계의 신석기시대 토기 중 시베리아와 연해주 및 아시아의 태평양에 면한 지역에만 국한되어 출토되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이들 토기는 유문토기와 민무늬토기로 나뉘는데, 유문 파편 중에는 동북지역 토기류와 유사한 것이 있다. 이 토기와 함께 채집된 1개의 점토제 안면상(顔面像)은 신석기인의 사유(思惟)와 종교관을 탐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V층은 다시 7개의 소층(小層)으로 세분되고, 여기서 원형(圓形)에 가까운 집터 10기가 확인되었으며, 그 안에는 70cm×70cm 크기의 사각형 화덕자리가 중앙에 1∼2개씩 설치되었다. 이 밖에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강자갈을 타원형으로 쌓아 만든, 큰 것은 지름이 330cm나 되는 야외 돌구이 돌무지[積石] 시설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오산리 신석기 하층문화의 주거형태가 신석기시대의 보편적인 주거형태인 구덩식[竪穴式]과는 다른, 지상가옥의 형태였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집터 내부와 주변에서 출토된 토기는 납작바닥을 기본으로 한 발형(鉢形)토기가 대부분이나 옹형(甕形)과 호형(壺形)토기도 있다. 석기로는 결합식 낚시도구, 세계적으로도 드문 대형의 혈암제(頁岩製) 톱, 사각형 돌칼[石刀], 흑요석 인기(刃器) 등이 출토되었다. 이 층의 각 층에서 채집한 목탄 7개를 측정한 결과, BC 6000∼BC 5000년으로 나타났다. 이 사실은 지금까지 우리 신석기문화의 기원지로 생각되어온 연해주보다 1,000∼2,000년 선행하며, Ⅲ층의 토기가 시기적으로 연해주와 평행관계에 있다고 볼 때, V층 문화의 기원을 종전대로 시베리아 ·연해주 기원론에 의거하여 생각할 수는 없게 되었다. 따라서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동해안 및 중국 북동지방을 잇는 여러 지역의 신석기문화에 새로운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출토된 흑요석에 대한 형광 X선분석 결과, 그 원석의 산지가 백두산으로 밝혀진 점도 이를 뒷받침할 뿐만 아니라, 선사문화의 전파와 교역에 중요한 과학적 단서를 마련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