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길

송준길

[ 宋浚吉 ]

요약 조선 중기 문신 겸 학자. 송시열 등과 함께 북벌 계획에 참여했으며 서인에 속해 분열된 서인 세력을 규합하는 데 힘썼다. 학문적으로는 송시열과 같은 경향의 성리학자로서 특히 예학에 밝고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동춘당 종택

동춘당 종택

출생-사망 1606 ~ 1672
본관 은진
명보
동춘당
시호 문정
주요저서 《동춘당집》 《어록해》
주요작품 〈충렬사비문〉 〈윤영순절비문〉

본관 은진(恩津). 자 명보(明甫). 호 동춘당(同春堂). 시호 문정(文正). 영천군수였던 송이창의 아들이다.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24년(인조 3) 진사로서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20여 년간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의 천거로 발탁되었다. 부사, 진선,장령을 거쳐 집의(執義)에 올랐고 송시열(宋時烈) 등과 함께 북벌계획(北伐計畵)에 참여하였다. 인조반정의 공신이었던 김자점과 원두표, 이완을 탄핵하여 물러나게 하였지만 김자점(金自點)이 북진정책을 청(淸)나라에 밀고하여 자신도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였다. 그 뒤 벼슬길에 여러차례 천거되었으나 사퇴하였다가 1658년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당시 송시열은 이조판서의 위치에 있으면서 송준길과 함께 국정을 주도하였다. 1659년 병조판서가 된 뒤 우참찬(右參贊)·좌참찬 겸 좨주(祭酒)·찬선(贊善)을 지냈다. 영의정이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를 비롯, 공주(公州) 충현서원(忠顯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송시열과 함께 서인에 속하여 분열된 서인 세력을 규합하는 데 힘쓰는 한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었을 때 남인(南人)의 주장을 물리치고 기년제(朞年制: 만 1년)를 관철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송시열과 같은 경향의 성리학자로서 특히 예학(禮學)에 밝고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에 문집 《동춘당집(同春堂集)》과 《어록해(語錄解)》가 있고, 글씨에 〈충렬사비문(忠烈祠碑文)〉(부산), 〈윤영순절비문(尹榮殉節碑文)〉(남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