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회

민회

[ 民會 ]

요약 고대 그리스·로마시대 도시국가의 시민총회.
로마 공화정의 구조

로마 공화정의 구조

호메로스서사시(敍事詩)에서는 아고라(agora), 아테네에서는 에클레시아(ekklēsia), 스파르타에서는 아펠라(apella), 그 밖의 고린투스의 폴리스에서는할리아(halia), 또는 할리아이아(haliaia)라고도 한다. 왕정(王政)·귀족정치·과두(寡頭)정치·민주정치 시대를 통하여 BC 3세기 마케도니아의 지배시대까지, 그리스사(史)의 전기간을 통하여 존재하였다. 참정권(參政權)과 참전(參戰)의 의무가 표리일체(表裏一體)를 이룬 고대 그리스에서는, 전시의 민회는 병원회(兵員會)가 되었고, 화전(和戰)·역병(疫病)대책·신탁(神託)대책 등을 토의하였다. 원시적인 왕정에서 왕은 민회의 결의를 무시할 수도 있었으나, 권리를 가진 사람(에콜레토이)들의 총회가 존재하면서 왕의 절대권은 제한되었다. 귀족정치·과두정치의 민회에서는 출생 ·부(富)에 따라 출석자는 제한되었다. 아테네의 민주정치 기간에는 가장 실력 있는 국사(國事)의 최고 ·최종 결정기관으로, 완전한 시민권을 가진 남자는 모두 출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족수(定足數:약 6,000명)에 달하지 않은 경우도 많아서, 페리클레스는 민회 출석자에게 일당을 지급하였다.

추천으로 선출되는 이외의 관리를 임면하고, 화평 및 그 밖의 모든 행정처리, 입법·사법·재정, 기타 거의 모든 국사 처리를 맡았다. 처리사항이 매우 많았기에 의안을 평의회(評議會)에서 사전에 정리한 뒤 민회에 돌리도록 하였지만, 민회는 수정안을 제출할 수는 있었다. 결정은 다수결로서, 거수 혹은 항아리 속에 투표용 조가비를 넣었다. 아테네의 민회는 처음에는 아고라에서, 다음에는 푸니쿠스 언덕에서, BC 4세기 이후에는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개최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개회하여 보통 연 40회(그 밖에 임시회도 있었다)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