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클레스

페리클레스

[ Pericles ]

요약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 ·군인. 평의회 ·민중재판소 ·민회에 실권을 가지도록 하는 법안을 제출해 민주정치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외교상으로는 강국과는 평화를 유지했고 델로스동맹의 지배를 강화했다. 페리클레스의 시대는 아테네의 최성기였다.
출생-사망 BC 495 ? ~ BC 429
국적 아테네
활동분야 정치, 군사

아버지는 크산티포스, 어머니는 아가리스테(클레이스테네스의 질녀). 소피스트적인 교육을 받았으며, 대단히 웅변적이었다. 철학자 아낙사고라스와 예술가인 소포클레스, 피디아스 등과의 교분이 두터웠다. 유소년기의 일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BC 472년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이 상연되었을 때, 그 비용을 부담하는 코레고스(합창대 봉사자)가 되었을 때이다.

최고의 명문 출신이었으나 키몬에 대항하기 위하여 귀족파가 아닌 민주파의 지도자가 되어 BC 462년 에피알테스와 함께 귀족세력의 거점인 아레오스파고스 회의의 권리를 박탈, 평의회 ·민중재판소 ·민회에 실권을 가지도록 하는 법안을 민회에 제출하였다. 이듬해 에피알테스가 정적에게 살해당하고, 키몬이 도편추방되자, 정계에서 그의 지도권은 확고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제3신분에 있던 자들까지도 최고관인 아르콘에 취임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배심관 ·관리의 일급(日給), 연극관람수당을 비롯하여, 관리를 희망자 중에서 추첨으로 선출하는 등 민주정치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BC 454년 그의 제안으로 델로스동맹의 기금을 델로스섬에서 아테네로 옮겼는데, 이때부터 동맹의 여러 도시는 거의 모두 아테네의 속국(屬國)이 되었고, 아테네는 제국(帝國)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 BC 447년부터는 파르테논신전의 건조를 시작하였고, 아테네 시가의 미화(美化)에도 힘썼다. 외교상으로는 페르시아와 ‘카리아스의 화약(和約)’을 맺고, BC 446년 스파르타와 향후 30년간의 화약을 맺는 등, 강국과는 평화를 유지하는 한편, 델로스동맹의 지배를 강화하였다.

BC 443년에는 정적인 투키디데스(역사가와는 다른 사람)도 추방, 그 후 죽을 때까지 매년(만년의 극히 단기간 제외) 스토라테고스(장군직)에 선출되어 ‘지상의 제우스’라 불리게 되어 이름은 민주정(民主政)이나 사실은 1인 지배라 할 만큼 페리클레스의 시대를 구가하였으며, 또 이것은 아테네의 최성기이기도 하였다. BC 431년 펠로폰네소스전쟁이 시작되자 굳게 농성(籠城)하는 한편, 해군으로 하여금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위협하는 전술을 취하였다. 그 무렵 그를 권력으로부터 추방하려는 음모가 있어, 아낙사고라스 ·피디아스 등 그의 측근들이 기소당하였으나 그를 실각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전쟁과 때를 같이하여 아테네에 유행한 질병에 걸려 병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