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고전기 아테네 육성

그리스의 고전기 아테네 육성

그리스사(史)의 고전기란 BC 5~BC 4세기에 걸치는 폴리스 사회의 최성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 시대는 페르시아 전쟁이라는 역사적으로 의의 깊은 대전쟁에 의해 개막되었다. 이오니아 식민시에서 페르시아에 대한 반란(BC 500~BC 493)이 일어났을 때, 아테네가 이를 원조한 것을 구실삼아 페르시아가 그리스 본토에 대원정을 단행한 것이다. 페르시아는 오리엔트의 통일된 대제국이었던 데 반해, 그리스는 수많은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있어 상식적으로는 페르시아에 대적할 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BC 490년과 BC 480~BC 479년 등 2번에 걸쳐 아테네군은 페르시아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동방 페르시아 전제정치에 대한 서방 폴리스 자유시민단(自由市民團)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로써 그리스의 자유가 수호된 동시에 아테네의 번영과 아울러 그리스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서양 문명 발전의 기반이 확립되었다. 즉 역사상 세계 최초의 동서전쟁(東西戰爭)이라고도 불리는 페르시아 전쟁에서의 그리스의 승리는 오리엔트적 전제정치로부터 폴리스적 자유와 그 문화를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그리스로 하여금 지중해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함으로써 유럽 문명의 본질을 결정짓게 하였던 점에 세계사적 의의가 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역사 전반을 통해 볼 때, 시기적으로 그리스인에게 가장 다행한 때에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폴리스 사회의 특색은 정치적으로 독립되어 있어 상호간의 분립 항쟁이 숙명적이었기 때문에, 같은 폴리스의 시민단 중에서도 귀족파와 평민파, 참주파와 반(反)참주파 사이의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 중에는 때로는 페르시아와 결탁하여 자기 폴리스 또는 자기 당파의 이익을 수호하려는 움직임이 음으로 양으로 계속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리스 제일의 강국인 스파르타와 참주정치를 무너뜨리고 민주정치로의 그 첫발을 내디딘 아테네가 상호협력하여 강대한 외적에 대항하였고, 다른 많은 폴리스도 이에 합세하였던 제1차적 요인이었던 것이다.

또 전술적인 면에서도 BC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의 아테네 육군의 승리와, BC 479년의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의 스파르타 ·아테네 및 기타 연합군의 승리가 말해 주는 것처럼 중장보병의 밀집대 전술이 당시에 이미 완성되어 있어, 페르시아 궁술기병(弓術騎兵)에 의한 전술보다 우월했던 데에도 또다른 승리의 원인이 있었다.

한편 BC 480년에 페르시아 해군은 이미 에게해에 진출하고 있어 이와 같은 육군의 빛나는 승리만으로는 그리스 본토의 독립이 보존될 수가 없었다. 이에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는 자국의 장래가 해군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일찍이 간파하고 해군확장론을 주장하였고, 은광(銀鑛) 개발을 통해 전비(戰費)를 마련함으로써 마침내 대함대를 건조하게 되었고, BC 480년의 살라미스 해전에서 아테네가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이 대승은 해군의 지위향상과 관련하여 그리스사상 또다른 중대한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다.

실상 중장보병의 육군과 해군은 그것을 담당하는 시민의 계층이 서로 달랐다. 해군을 담당한 자들은 솔론의 재산등급으로 제4급에 해당하는 저소득 대중이었다. 따라서 해군의 발전은 정치의 철저한 민주화를 예측시켜 주는 것이었으며,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와 그에 따른 아테네 상비함대의 활약이 아테네 민주정치의 완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던 사실을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도 인정하였던 사실이다.

BC 479년 플라타이아이 전투의 결과 페르시아 육군이 그리스 본토에서 전면 후퇴한 이래, BC 43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될 때까지를 이른바 ‘50년기’라 하는데, 이 반세기 동안은 고대그리스의 최성기인 동시에 아테네의 극성기이기도 하였다. 이 기간에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립은 점차 현저해져 때로는 냉전에서 열전으로 변한 일도 있었지만, 아테네의 페리클레스는 BC 449년 페르시아와 화의(和議)를 맺고 아울러 BC 446년에는 스파르타와 ‘30년의 화약’을 맺음으로써, 이후 15년간 그리스사상 진기한 평화시대를 현출시켰다(페리클레스 시대).

이처럼 아테네가 그리스 전체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BC 477년에 성립된 델로스 동맹의 맹주(盟主)였기 때문이다. 이 동맹은 펠로폰네소스 동맹 산하의 폴리스와 중립을 지킨 크레타섬의 도리아인 폴리스를 제외한 에게해 주변의 모든 폴리스를 포용하고 있었으며, 융성시에는 참가 폴리스의 수가 200개나 되었다. 그리고 참가 폴리스는 병선(兵船)과 승무원을 파견하거나 아니면 자기 폴리스의 실력에 맞게 공출금을 낼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후에는 점차 화폐 대납방법이 일반적이었다.

이처럼 이 동맹의 자금은 처음에는 델로스섬의 아폴로 신전(神殿)에 예치해두고 여기서 동맹회의도 열었지만, 당시 아테네의 통치자였던 페리클레스는 이 동맹의 금고마저 델로스섬으로부터 아테네로 옮겨 이를 아테네의 재건만을 위해 썼다. 이 결과 아테네는 동맹 여러 폴리스에 군림하는 ‘폭군도시(暴君都市)’로 변하였고, 동맹 여러 폴리스는 아테네에 세금을 바쳐야 하는 납세자 격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물론 이에 대해 몇 폴리스의 반항도 있었지만, 산발적이었고 아테네의 이른바 ‘페리클레스 시대’라는 전에 없었던 번영을 누려 마침내 정치적 ·문화적으로 그리스 문화의 진수를 이루었던 것도 이처럼 동맹 여러 폴리스의 희생으로 가능하였던 것이다.

또 페리클레스에 의해 고대그리스 민주정치의 격식을 모두 갖춘 것도 바로 이 시기의 일이었으며, 이것은 BC 5세기 전반 이래 몇 차례의 개혁을 거침으로써 완성되었는데, 그 주요한 특색은 다음과 같다.

① 국정의 최고결정권은 민회(시민총회)에 있었으며, 성년 남자시민의 거수에 의한 다수결로 의안을 결정하였다. 의안은 500명 평의회가 예심한 후에 제안되지만, 이 평의회원도 시민 자원자 중에서 매년 추첨에 의해 선출될 뿐 다같이 시민의 대표였다.

② 관리자격은 솔론이 제정한 제3급 이상이며, 재산이 전혀 없는 자가 아니면 최고관인 9명의 집정관직도 지원할 수가 있었다.

③ 관리의 임기는 모두가 1년이며, 이는 시민 각자가 교대로 관직을 맡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즉 시민 사이에 치자(治者)와 피치자(被治者)의 차별을 만들지 않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④ 관리선출은 선거로써가 아니라 추첨에 의해서였다. 이는 시민 누구에게나 동일한 기회를 보장할 수는 있었지만, 중우정치(衆愚政治)가 될 확률도 있었던 것으로, 이것이 아테네 민주정치와 로마공화정치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었다.

⑤ 따라서 일반시민도 추첨에 따라 최고관 이하의 관직에 취임할 수 있었다. 임기가 끝나면 집무보고를 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만일 부정이 있을 경우에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⑥ 그렇지만 누구나가 최고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 관리의 권위는 곧 저하될 수밖에 없었다. BC 5세기경부터 국가의 안위를 맡는 장군의 직책만은 매년 10명씩 선거제로 뽑아 다른 관리와는 달리 중임(重任)을 허용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더욱이 장군의 직책은 다른 직책과는 달리 그 책무가 무거울 뿐만 아니라, 자비지출(自費支出)을 해야 할 경우도 많아서 자연히 명문이나 부자가 입후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몇 차례 중임하던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국정상에서도 발언권이 강해져서 지도적 정치가로서의 지위를 굳혀갔던 것이다. 전후 15년간에 걸쳐 이 자리를 차지했던 페리클레스가 그 가장 좋은 예이다.

⑦ 민중재판소의 배심원도 시민의 희망자 중에서 추첨되었고, 이들의 다수결에 의한 판결로써 재판하는 관습도 생기게 되었다. 아테네 시민 사이의 민사소송은 물론, 델로스 동맹의 폴리스 내부의 중대사건까지도 이들 시민들이 재판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아테네 민주정치에서는 모든 것을 결정함에 있어 투표보다도 추첨을 중시하였다. 이는 시민 누구에게나 동일한 기회를 보장하려는 의도의 표현으로서 극단적 민주정치의 성격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민주정치는 부녀자와 노예를 제외한 어디까지나 성년 남자시민만의 민주정치였고, 대의제(代議制)가 아닌 전체적인 정치참여라는 점에서 근대 민주정치와 구별된다. ‘50년기’에는 바로 이와 같은 아테네식의 민주정치가 그리스 전토에 유행한 시기였다. 다만 스파르타만은 쇄국주의를 견지하고 외부의 민주화 경향의 영향을 배척하고 있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