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전쟁

페르시아전쟁

[ Greco-Persian Wars ]

요약 BC 492년부터 BC 479년까지 지속된 페르시아 제국의 그리스 원정 전쟁으로, 그리스의여러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 제국에 연합 대응하여 성공적으로 공격을 막아내었다.
테르모필레의 레오니다스

테르모필레의 레오니다스

페르시아는 BC 525년까지 오리엔트를 통일하고, BC 513년부터 발칸 반도 원정을 시작했다.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점령한 다리우스왕은 다뉴브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영토를 확장했다. 이 때 트라키아 반도에 주둔하던 아테네 군 사령관 밀티아데스(Miltiades)가 페르시아 군의 진격을 막고자 다리를 불태웠으며, 이는 페르시아제국의 왕 다리우스 1세의 분노를 샀다. 이것이 후에 페르시아의 트라키아 공격의 원인이 되었다.

페르시아전쟁 본문 이미지 1
마라톤전투아케메네스왕조페르시아페르시아전쟁

제1차 원정

BC 499년에는 소아시아 연안에 있는 이오니아(Ionia) 지방의 그리스 도시 밀레투스(Miletus)의 정치가 아리스타고라스(Aristagoras)를 중심으로 여러 소도시들이 연합하여 이오니아 반란(BC 499∼BC 494)을 일으키자, 다리우스 1세는 이를 먼저 진압하고자 했으며, BC 494년 이오니아 소도시들을 모두 점령했다. 다리우스 1세는 BC 492년 함대를 정렬하고, 사위 마르도니우스(Mardonius)를 사령관으로 하여 그리스 북쪽에 있는 트라키아 원정을 시작했고, 함대는 헬레스폰트 해협(Hellespont, 오늘날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했다. 그러나 함대는 아토스(Athos) 곶(串)에서 폭풍을 만나 난파했으며,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300척의 전함과 20,000명의 군사를 잃었다고 한다. 이것을 흔히 제1차 페르시아전쟁이라고 하는데, 이 때 페르시아가 노린 것은 트라키아였다는 점에서 페르시아전쟁에 포함시키지 않는 학자도 있다. 또한 트라키아는 페르시아의 세력권에 들어감으로써 목적은 일단 달성한 셈이다.

제2차 원정

BC 490년, 페르시아 제국은 제2원정에 들어갔다. 다리우스 1세의 형제 아르타페네스(Artaphernes)와 장군 다티스(Datis)는 실리시아(Cilicia) 군을 주력부대로 하는 대군을 이끌고 아티카(Attica)와 에레트리아(Eretria) 시(市)를 공격했는데, 그 명분은 이오니아 반란을 도왔다는 것이었다. 당시 페르시아의 군사력에 대해 헤로도토스는 약 2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고대 로마 역사가 코넬리우스 네포스(Cornelius Nepos)는 보병 20만 명, 기병 1만 명으로, 플루타르코스(Plutarch) 등의 학자는 30만 명으로, 심지어 플라톤 등은 5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20만 명 가령이 전쟁에 동원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페르시아 함대는 키클라데스(Cyclades) 제도(諸島) 연안을 따라 에우보이아의 에레트리아를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이어 아테네 북동쪽에 있는 마라톤(Marathon) 평야에 상륙, 아테네를 공격하였다. 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스파르타는 종교행사를 이유로 파병을 지체했고, 아테네는 1만 명 본군과 프라타이아에서 온 1천 명의 지원군으로 페르시아 군과 맞섰다. 그러나 아테네군은 중장병(重裝兵) 밀집대전술(密集隊戰術)로 페르시아에 크게 이겼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군은 6,400명을 잃은 반면 아테네군은 192명만을 잃었다. 이후 페르시아군은 아테네 공략을 단념하고 스니온 곶을 돌아 귀국하였다.

제3차 원정

전쟁에서 패한 뒤, 다리우스 1세는 다시 전면적인 그리스 원정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BC 489년부터 수년간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서 반란이 지속되어 원정이 연기되었으며, 다리우스 1세의 사망으로 아들 크세르크세스(Xerxes I : 재위 BC 485 ~ BC 465)가 그 뒤를 이었다.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대와 물자를 모아 진격했으나, 유례없이 큰 규모로 인해 진군 속도가 느려졌으므로, 그리스군은 그 동안 충분한 방어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30개 그리스 도시국가가 참여한 동맹이 결성되었으며, 육군은 스파르타가, 해군은 아테네가 지휘권을 맡았다.

그리스군은 테르모필레의 협로에 7천 명의 병력을, 아르테미시움에(Artemisium) 271척의 전함을 배치하고 페르시아군을 맞았다. 페르시아군은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선교(船橋)를 걸고, 아토스 곶에 운하를 판 뒤, BC 480년 8월, 해륙(海陸) 양면에서 그리스를 공격하였다.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는 중부 그리스로 가는 통로에 해당하는 테르모필레의 협로를 지켰으나 내통자(內通者)가 생겨 돌파당함으로써 전원 전사하였다. 그러나 해전(海戰)에서는 양측 모두 해전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승패가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대함대 건조 제안을 채택하여 페르시아의 재침공에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이 함선에 탈 것을 설득, 아테네 전면(前面)의 살라미스(Salamis) 섬과의 사이에 있는 바다에서 페르시아 함대와 싸워 이겼다. 크세르크세스는 곧 귀국하여 마르도니우스에게 자기의 뒤를 잇도록 하였다. BC 479년 마르도니오스는 플라타이아이에서 그리스 연합군과 싸워 패하였고, 같은 해 그리스 함대가 소아시아의 미칼레전투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하였다.

이렇게 하여 세 번(또는 두 번)에 걸친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은 모두 실패하고,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페르시아의 원정을 맞아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잘 싸웠으나, 그리스의 도시 중에는 페르시아에 항복한 도시도 있었다. 또한 아테네 안에서도 페르시아와 내통하는 자가 있었다. BC 480∼BC 479년 그리스군의 총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스파르타였으나, 그 후로는 아테네가 대신 연합함대의 지휘권을 쥐고 있다가, 마침내 델로스 동맹의 맹주(盟主)가 됨으로써 그리스의 패권을 잡았다. 마라톤에서는 중산시민(中産市民)이 중장보병(重裝步兵)으로서 활약하였고 살라미스에서 무산대중(無産大衆)이 수부(水夫)로서 활약하여, 정치적 발언력이 그들에게까지 미쳐, 아테네의 민주화를 촉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