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암흑시대와 폴리스 성립

그리스의 암흑시대와 폴리스 성립

BC 2000년경 동방 방언군에 속하는 이오니아인과 아이올리아인(아카이아인 포함)이 남하하여(제1차 남하) 아카이아인의 일부가 미케네 문명을 이룩하고, 이어 BC 1200년경부터 서방 방언군의 도리아인이 급격히 남하하여(제2차 남하) BC 1100년경 철기(鐵器)로써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정복, 미케네 문명을 파괴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 과정에서 미케네 문명의 중심이던 왕궁이 파괴되어 문자가 잊혀짐으로써 오랜 세월 동안 문자가 없는 시대가 계속되었다. BC 1100~BC 750년경까지의 이 시기를 편의상 암흑 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역사의 움직임도 분명하지 못하였고, 또 볼 만한 문화의 발달도 없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 대하여 전해주는 문서가 별로 없어 자세히는 알 수 없더라도 문자 그대로 정체된 상태로만 계속된 시기만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그리스인이 오리엔트적 영향하에 있던 에게 문명을 청산하고 독자적인 그리스 문화를 이룩해내는 과도기(過渡期)로서의 의미를 지닌 중대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실로 이 시기는 뒤의 폴리스 탄생을 위한 오랜 준비기간이었으며, 진실한 의미의 그리스 사회는 이 시기에 서서히 태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암흑시대가 끝나가는 BC 8세기를 전후하여 그리스에서는 토지의 사유화(私有化) 경향이 뚜렷해지며, 대토지 소유자로서의 귀족이 군사적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미케네 시대의 왕정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변천 과정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듯이 왕가(王家)가 계속된 다른 곳에서도 왕권은 점차 쇠퇴해 갔다. 그리하여 경제적 ·군사적으로 이해(利害)를 같이하는 각 부락의 귀족층은 지배와 집단방위(集團防衛)를 위해 편리한 곳(즉, 아크로폴리스)을 골라 집주(集住:synoikismos)를 시작하게 되었고, 여기서 마침내 폴리스의 성립을 보게 된 것이다.

폴리스의 성립은 당시의 전투에서 불가결했던 전차(戰車)와 말을 소유한 귀족들의 지배권이 확립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테네에서도 왕권이 서서히 제한되어 종교적 지도자로 전락된 반면, 귀족의 지배권은 크게 강화되어 마침내 BC 683년부터는 임기 1년인 9명의 집정관(執政官)이 나와 행정 ·사법 ·군사의 대권을 장악하고 귀족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스파르타에서는 BC 9세기경 입법자 리쿠르고스에 의해 중심시(中心市) 스파르타에 집주하게 되어 두 왕가에서 나온 2명의 왕을 포함한 3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元老院)과, 모든 스파르타인이 출석하는 민회(民會)의 제도가 정해졌다고 전한다. 이들 중에서 임기 1년인 5명의 최고행정관(ephors)이 선출되어 왕권을 제한하였는데, 이것은 30명의 원로원이 스파르타의 정치를 좌우한 귀족과두정체(貴族寡頭政體)의 하나였다.

원래 스파르타 도시국가의 정식명칭은 라케다이몬(Lakedaimon)으로, 1만 명에 불과한 스파르타인은 자신들보다 10배가 넘는 원주민을 정복하여 그들을 국유노예(hellot)로 하고, 여기에 다시 자신들의 3∼4배나 되는 반자유민(perioichoi:변두리 주민)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참정권(參政權)은 소수의 귀족을 중심으로 한 스파르타인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이들 스파르타인은 모두 국유노예가 세습적으로 경작하는 분할지(分割地)를 소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사적(戰士的)인 기질이 매우 강하였다. 그 밖의 다른 폴리스에서도 일반민중(demos)이 민회를 구성한 흔적은 분명하지 않지만, 분할지를 가진 소 자유농민이 널리 깔려 있던 점은 후세 그리스 민주정치의 성립을 이루는 근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