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남북전쟁

[ American Civil War , 南北戰爭 ]

요약 1861년부터 1865년까지 미국의 북부와 남부 사이의 내전으로 ‘제2의 미국 혁명’이라 불리기도 한다.
치카마우가-채터누가국립군사공원

치카마우가-채터누가국립군사공원

미국은 1861년 4월부터 1865년 4월까지 연방(Union) 정부와 남부 11개 주로 구성된 남부연맹(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사이에 남부의 노예제도에 대한 이견으로 내전(Civil War)을 겪었다. 내전 결과 노예제가 폐지됨으로써 제2의 미국혁명(2nd American Revolution)이라 불리기도 한다. 내전은 남부연맹이 연방 정부의 군사 요새였던 섬터(Fort Sumter)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남부가 섬터 요새를 공격한 근본적인 원인은 남부의 노예제에 대한 북부와 남부 주 사이의 오래된 갈등이었다. 4년 동안 양측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내전 중 1863년 1월 연방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은 노예해방령을 공포했다. 1864년 4월 남부연맹이 항복함으로써 전쟁이 종식되었다. 내전으로 인해 양측의 물적 및 인적 피해가 막심했다. 인명 피해는 남북을 합쳐서 무려 60여 만 명에 이르렀다. 미국이 독립 이후 치른 모든 전쟁에서 발생한 인명 피해를 모두 합친 것보다도 많은 수였다. 전쟁 후 남부에는 연방군이 주둔하며 남부 재건정책(Reconstruction1865-1877)을 주도했다.

내전의 배경

1787년 연방을 창건하기 위해 연방 헌법을 제정하던 시기부터 남부와 북부는 노예제에 대해 현격한 이견을 보였다. 북부는 독립 이후 노예제를 폐지하기 시작하였으나 남부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헌법을 제정하면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노예를 인구수에 포함시키는 문제였다. 양측의 의견이 갈렸으나, 흑인 노예 인구의 5분의 3만 총 인구 수에 포함시킨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북부는 남부의 노예제가 점차 사라질 것으로 기대했으나 면화산업이 발달하면서 남부의 노예제는 더욱 확대되었다. 양측의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1820년 북위 36°30′ 이북에 신설되는 주에 대해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미주리 타협을 통하여 공존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1854년 노예문제를 지역민들이 결정하게 하는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의 제정으로 미주리 타협은 무너졌다. 거기다 1857년 드레드스콧판결에서 미주리 타협이 위헌법률이라는 결정이 남으로써 노예제에 대한 남부의 입장만 더 유리해졌다. 이로써 노예문제를 둘러싼 남북 간 타협의 정신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1860년 11월 대선에서 노예제를 반대하는 공화당의 대선 후보인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사우스캐롤라이나주를 시작으로 연방을 탈퇴하는 남부 주들이 생겨났다. 1861년 3월 링컨이 연방 대통령으로 취임하기까지 7개 남부 주가 연방을 탈퇴하여 남부연맹(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창설했다. 마침내 1861년 4월 남부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항구 입구에 위치한 연방의 섬터 요새(Fort Sumter)에 포격을 가함으로 전쟁은 시작되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버지니아주를 비롯하여 남부 4개 주가 남부연맹에 추가로 가담했다.

남북전쟁 본문 이미지 1

내전의 전개

섬터 요새가 공격을 받자 연방 대통령 링컨은 즉각 연방군대의 소집을 명령하며 응전에 나섰다. 전쟁 초기 남부는 공세적인 전략을 선택했다. 수도 워싱턴을 놓고 남부군은 공격을 하고 북부 연방군은 수비를 하는 상황이었다. 남부군 사령관 로버트 리(Robert Lee) 장군이 공격을 주도했다. 전쟁 상황이 남부에 유리한 1863년 1월 초 링컨 대통령은 흑인 노예를 모두 해방하는 노예해방령(Emancipation Proclamation)을 공포했다. 이때까지 남부가 전쟁을 하는 목적은 주의 권리(states’ rights)를 수호하기 위함이라는 남부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노예해방령이 나오면서 노예제를 유지하려는 남부와 그에 반대하는 북부 연방군 사이의 전쟁으로 목적이 바뀌었다. 연방군이 도덕적으로 우월한 입장이 된 것이다. 또한 1863년 7월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로버트 리 장군이 지휘하는 남부군이 패배하면서 남북전쟁의 전세가 북부에 유리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1863년 11월 게티즈버그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추념하는 기념식에서 링컨 대통령은 전쟁의 목적이 미국의 독립선언에 명시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평등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게티즈버그 전투 이후 남부는 수세에 몰렸다. 북부 연방군은 남부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가하며 남부지역으로 진격했다. 남부연맹의 수도인 리치먼드(Richmond)가 있던 버지니아주가 주요 격전지가 되었다. 1865년 4월 9일 로버트 리 장군 지휘 아래 있던 남부군은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 Grant) 장군이 지휘하는 연방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버지니아주 아포맷톡스(Appomattox)에서 항복했다. 이어서 4월 26일 노드 캘롤라이나 주에서 남부군의 조셉 존스턴(Joseph Johnston) 장군이 연방군의 윌리엄 셔먼(William T. Sherman) 장군에게 항복함으로써 남북전쟁은 종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