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즈버그연설

게티즈버그연설

[ Gettysburg Address ]

요약 1863년 11월 19일 펜실베이니아 주 게티즈버그에서 행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연설.

1863년 11월 19일 남북전쟁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전몰장병들을 추념하여 행한 연설이다. 연설문은 270여 단어로 구성된 짧은 연설이지만, 남북전쟁의 역사적 의미뿐 아니라 미국의 건국 정신 및 민주주의의 핵심적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요약하였다. 흔히 영어로 쓰여진 최고의 명연설로 평가된다.

역사적 배경

1863년 11월 19일 게티즈버그에 국립묘지를 설치하게 된 이유는 1863년 7월 1일부터 3일까지 남부군과 연방군이 사이에 있었던 게티즈버그 전투 때문이었다. 1863년 여름, 남부군의 로버트 리(Robert Lee) 장군은 남부를 벗어나 북부 지역인 펜실베이니아주로 진격했다. 남부군의 최정예 부대를 이끌고 북쪽 땅을 밟은 리 장군은 수도 워싱턴을 북쪽에서 공격할 계획이었다.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는 작은 마을로서 군사적 요충지가 아니었다. 남부군은 이곳을 잠시 들렀다가 지나갈 작정이었다. 한편 남부군이 북쪽으로 진격해 온다는 첩보를 입수한 북부 연방군은 남부군을 찾아 게티즈버그로 향하고 있었다. 북부 연방군의 총사령관은 조지 미드(George Meade) 장군이었다.

1863년 7월 1일 북부 연방군과 남부군은 펜실베이니아 주 게티즈버그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양쪽을 합하여 약 17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군대가 작은 마을 게티즈버그에서 예상치 않던 전투를 벌이게 된 것이다. 양측 모두 수 만 명에 이르는 인명 피해를 입었다. 전사자와 부상자 및 행방불명된 장병을 모두 포함한 인명피해가 남부군은 약 2만 8천 명에 달했고, 북부도 약 2만 3천 명에 이르렀다. 인명 피해를 기준으로 보면 전투의 승패를 가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7월 4일에 남부군의 리 장군이 전투를 중단하고 버지니아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후퇴하는 남부군을 추격하여 공격하였다면 더 큰 피해를 입힐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미드 장군은 남부군을 추격하지 않았다. 남부군은 더 이상의 피해 없이 후퇴할 수 있었으나 이후 남부군은 전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북부로 전세가 기운 결정적 전투였다.

게티즈버그 전투가 끝나고 양측의 군대가 철수하자 전사한 장병들의 시신 매장이 큰 문제로 떠올랐다. 남부군과 북부군의 전사자 시신이 게티즈버그 전투지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게티즈버그 주민들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펜실베이니아 주 정부 차원에서 매장이 진행되었고, 게티즈버그에 국립묘지를 새로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국립묘지 건설과 시신 매장이 끝나고 마침내 11월 19일 국립묘지 봉헌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연설문의 내용

1863년 11월 19일 게티즈버그 국립묘지 봉헌식에 링컨은 연방 대통령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봉헌식의 주 연설자는 하버드대학 전직 총장 에드워드 에버렛(Edward Everett)이었다. 에버렛은 1850년대 초 연방 정부의 국무장관을 역임하였고 당대 최고의 연설자로 평가받던 인물이었다. 에버렛은 2시간에 걸쳐 봉헌식을 위한 기념 강연을 했다. 그의 연설문의 길이는 1만 3천 단어가 넘었다. 에버렛이 강연을 마친 후 링컨 대통령의 연설이 이어졌다. 그의 연설은 2분 정도 걸렸다. 270여 단어로 구성된 짧은 연설이었다.

링컨은 연설에서 먼저 미국은 87년 전(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에 자유(liberty)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탄생한다(all men are created equal)’는 평등의 이념 아래 탄생된 국가임을 지적했다. 이어서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희생된 전사자들은 자유와 평등의 건국 정신을 지키기 위하여 전사한 것이라며 남북전쟁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마지막으로 링컨은 생존자들이 책임져야 하는 역사적 사명을 강조했다. 생존자들은 “하나님의 가호 아래 (under God) 자유의 새로운 탄생(a new birth of freedom)과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가 지구상에서 영원히 멸망하지 않도록(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하는 과업을 완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티즈버그 연설문은 현재 다섯 개의 링컨 자필 사본이 존재하지만 서로 일치하지는 않는다. 링컨의 백악관 비서였던 존 헤이(John Hay)나 존 니콜라이(John Nicolay)에게 남긴 연설문 사본조차 일치하지 않는다. 다섯 개의 사본 중에 일반적으로 알렉산더 블리스(Alexander Bliss)에게 남긴 사본이 표준 사본으로 인정받고 있다. 블리스 사본에는 연설문의 제목, 날짜 및 링컨의 사인이 분명하게 남아 있다. 당시 신문에도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이 실렸으나 기자의 속기록에 의한 것이라 표준 사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평가 및 의의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의 가치를 가장 먼저 인정한 사람은 에버렛이었다. 그는 게티즈버그 봉헌식 다음 날 링컨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2시간에 걸친 연설보다 링컨의 2분 동안의 연설이 더 행사의 핵심적인 생각(central idea of the occasion)을 담고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일반 여론의 반응은 당파에 따라 달랐다. 공화당을 지지하는 신문들은 링컨의 연설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민주당을 지지하는 신문들은 링컨의 연설을 혹평했다.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은 봉헌식 후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인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링컨의 암살 이후 더욱 많아졌다. 그 후 미국 학교 교육에서 연설문이 가르쳐지고 암송되면서 미국인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되었다. 현재 게티즈버그 연설문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인상적인 장소는 수도 워싱턴의 링컨기념관이다. 링컨 기념관의 왼쪽 벽에 게티즈버그 연설 전문이 새겨져 있다. 기념관 오른쪽 벽에는 링컨의 2차 취임 연설문이 새겨져 있다. 현재도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은 미국뿐 아니라 많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 정신을 가장 정확하게 지적한 연설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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