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의 결과

남북전쟁의 결과

요약 1865년 4월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연방이 승리하고 남부는 연방군의 군사 통치 하에 놓였다.
원어명 Why the North Won

북부의 승리 요인

1865년 4월 26일 남북전쟁에서 연방이 승리하고, 항복한 남부에는 연방군이 주도하는 재건정책이 실시되었다. 전쟁을 시작할 때 남부는 쉽게 승리할 것으로 자신했다. 그러나 결과는 북부의 승리였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북부의 승리는 예견된 것이었다. 물적 및 인적 규모에서 북부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남부연맹에 가담한 주는 11개 주였지만 북부 연방에 남은 주는 23개 주였다. 북부의 총인구는 2천만 명이 넘었고 새로운 이민자도 계속 오고 있었다. 그러나 남부 총 인구는 약 9백만 명이었고 이중 4백만 명 정도는 흑인 노예였다.

경제력도 북부가 남부보다 훨씬 우세했다. 제조업 제품의 90퍼센트가 북부에서 생산되었다. 면화는 남부에서 생산되었지만 면직물 생산량은 북부가 17배 많았다. 철제 생산은 20배, 무기 생산은 32배로 북부가 많았다. 남부가 총 100정을 만들 때 북부는 3,200정을 생산할 수 있었다. 남부의 경제는 면화를 기반으로 하며 인구의 80 퍼센트가 농업에 종사했다. 사회간접자본도 열악했다. 전국 철도의 29 퍼센트, 전국 은행의 12 퍼센트만 남부에 있었다.

남부의 경제적 약점을 남부 지도자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부는 세계 면화 공급량의 약 60 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남부 지도자들은 면화를 무기화할 생각이었다. 남부 지도자들은 남부가 면화를 무기로 영국에 지원을 요청하면, 영국은 당연히 남부를 지지할 것으로 믿었다. 실제 링컨 대통령이 무역을 금지하자 영국 경제에 문제가 생겼다. 영국의 면화 수입의 80 퍼센트가 미국 남부에서 공급되고 있었다. 영국 수출품의 38 퍼센트가 면직물이었다. 남부 면화의 영국 수출이 금지되자 영국 면직 공장들이 조업을 중단했고 영국 경제 자체가 곤경에 처했다.

남북전쟁 초기 영국은 남부를 지지했다. 직접 참전은 하지 않았지만 해상 봉쇄를 비난하며 전쟁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한편 면화 공급이 끊긴 영국 공장들은 생산을 줄이고 인도산 면화를 수입하는 등 위기 극복에 노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863년 초 링컨이 노예해방령(Emancipation Proclamation)을 발표하자 영국의 지원을 기대하던 남부의 희망은 사라졌다. 영국은 면화를 이유로 미국 내전에 참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영국은 노예를 불법화 시킨 나라였다.

링컨의 노예해방령은 대외적 효과뿐 아니라 대내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연방정부가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써 남부 노예들은 언제든 주인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노예주들은 노예 반란에 대한 심각한 불안을 느꼈다. 또한 연방군이 점령하는 남부 지역의 흑인들은 연방군대에 입대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전체 연방군의 10%에 달하는 179,000명의 흑인들이 연방군에 복무했으며 4만 명 정도의 흑인 병사들이 전사했다.

그러나 전쟁 초기 대통령 링컨의 지도력은 의심을 받았다.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경력은 남부연맹의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보다 미약했다. 데이비스는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멕시코전쟁에 참전한 전투 경험이 있었다.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 정부 때는 국방장관을 지냈다. 실전 경험과 행정 경험을 모두 갖춘 인물이었다. 데이비스는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남부연맹의 국방장관을 겸직하며 전쟁 사소한 문제까지 직접 관여했다.

링컨은 인디언 전쟁에 잠깐 참여한 것이 군사 경험의 전부였고, 군 행정 경험은 전혀 없었다. 연방 하원으로 1847년부터 1849년까지 2년간 워싱턴에서 의원직을 수행한 것이 공직 수행의 전부였다. 링컨은 일리노이주에서 말을 타고 순회 재판소를 돌아다니며 변호하는 일로 삶의 대부분을 보냈다. 시골 변호사였던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정부에 참여했던 초창기 장관들은 링컨의 대통령 업무 수행 능력을 의심했다. 군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동부 전선 최고 사령관이었던 매클레런 장군은 링컨의 명령을 무시하는 태도까지 보였다. 그러나 링컨은 자신보다 강력한 인물들을 주변에 두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했다. 전쟁과 관련해서는 큰 전략적 문제 외에는 작은 군사 작전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전후 변화와 링컨 암살

북부의 승리는 남부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17세기 초부터 존재하며 남부 경제의 기반이 되었던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1863년 1월 전쟁 중 대통령 명령으로 발표된 노예해방령을 보완하기 위하여 링컨은 연방 헌법의 개정을 추진하였다. 1865년 초 노예제도를 영원히 금지하는 헌법 수정조항 13조를 마련해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링컨은 반란을 일으킨 남부 주들에 대해서도 정치적으로나 법적으로 보복할 마음이 없었다. 1863년 12월 링컨은 남부 반란 주의 남자 성인 주민의 10 퍼센트 이상 연방 복귀를 원한다면 책임을 묻지 않고 연방에 복귀시키겠다는 안을 발표했다. 소위 “10 퍼센트 안(10 Percent Plan)”이었다. 또한 1865년 3월 제2차 대통령 취임사에서 링컨은 전쟁의 책임을 묻는 대신 자비를 강조했다. 그러나 링컨은 전쟁 직후 1865년 4월 15일 암살됨으로써 그의 계획은 빛을 보지 못했다. 그에게는 분열된 나라를 하나로 만드는 일을 비롯해 해방된 흑인과 백인의 통합문제 등 전후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가 있었다. 전후 과제(Reconstruction)는 남부에 주둔한 연방군에게 맡겨졌다.

내전의 결과 및 의의

남북전쟁으로 인한 남부와 북부의 물적 및 인적 피해는 계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대하였다. 특히 병사들의 개인 무기가 머스켓(musket)에서 소총(rifle)으로 바뀌었으나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때와 같이 평지에서 싸우면서 적진으로 돌격하는 전투 방식을 답습한 탓에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남부와 북부가 입은 인명 피해만 60만 명이 넘었다. 이 숫자는 미국이 건국 후 21 세기까지 겪은 모든 전쟁에서 전사한 사망자의 숫자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수였다. 전투가 종식된 이후에도 연방군대는 1877년까지 남부에 계속 주둔하면서 남부의 재건정책을 추진했다.

북부는 남북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미국 역사의 주류세력이 되었다. 남북 갈등의 핵심 원인이었던 노예제도는 1863년 노예해방령에 이어 1865년 1월 헌법 개정(수정조항 13조)을 통하여 완전히 금지되었다. 노예제의 폐지는 독립선언에 나타난 만민 평등사상의 실현이었다는 점에서 남북전쟁은 제2의 미국혁명이라는 의미도 갖게 되었다. 남부연맹을 창설하면서 각 주는 연방을 탈퇴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던 주권론자(states’ rightists)의 주장은 효력을 잃고 말았다. 대신 남북전쟁은 미국 연방을 분리할 수 없는 완전한 하나의 국가로 재탄생시켰다. 남부와 북부의 경쟁 대상이었던 서부 개척은 전쟁 후 북부가 주도하게 되면서 동북부와 서부가 긴밀하게 연결된 경제 공동체 관계를 맺게 되었다. 대신 남부는 고립되면서 경제적으로 후진 지역으로 남고 말았다. 남부에 남아 있던 많은 해방된 흑인들 역시 농업이 기반인 남부 사회에서 경제적 빈곤과 차별적 사회체제에 갇히고 말았다. 흑인들이 차별대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또 다시 100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