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레타리아 문학

프롤레타리아 문학

다른 표기 언어 proletarian literature

요약 부르주아 계급문학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목적의식적으로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의도하는 문학.

약칭은 프로 문학. 19세기 중엽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 Manifest der Kommunistischer Partei〉(1848)을 발표하고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할 즈음에 성립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자연발생적인 부분을 많이 내포하고 있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함으로써 전세계적인 문학운동으로 확산되었고, 코민테른의 활동이 본격화됨에 따라 전세계에 파급되었으므로 혁명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소련의 라프(RAPP), 프랑스 클라르테, 일본의 나프(NAPF) 등이 당시의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단체이다. 이중 클라르테는 한국의 프롤레타리아 문학 초기의 주요이론가인 김기진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나프는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한국의 프롤레타리아 문학

배경 및 전개

한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3·1운동 이후 사회운동의 활성화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1925년 8월 카프의 결성으로 본격적인 활동이 전개되었다.

카프는 1926년 준(準)기관지 〈문예운동〉을 펴내면서 사회적 태도를 분명히 했으며, 사회운동 방향전환의 계기가 되었던 정우회 선언이 발표되고 신간회가 결성되자 1927년 9월 1일 총회를 열어 문호개방과 조직확장을 꾀했다. 그와 더불어 제1차 방향전환을 시도했다.

제1차 방향전환은 '목적의식론'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종래의 자연발생적 단계에서 벗어나 목적의식적 문학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등장한 일본 유학생 출신의 제3전선파는 아나키즘계와 논쟁을 벌이는 한편 민족주의파를 축출하고 카프의 주도권을 잡았다. 제3전선파의 중심인물은 조중곤·김두용·이북만·홍효민·한식 등으로, 이들은 과감한 이론투쟁과 대중투쟁을 병행했다.

1931년을 전후한 제2차 방향전환은 밖으로는 신간회의 해체에 자극받았고, 안으로는 김기진의 대중화론에 대한 소장파의 반대로 비롯되었다.

김기진(金基鎭)
김기진(金基鎭)

김기진의 대중화론이 대중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맞추려 한다는 점을 비판한 소장파의 견해는 '투쟁하는 계급의식'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런 이유로 제2차 방향전환을 '볼셰비키화론'이라 부르기도 한다. '전위의 눈으로 세계를 보라'와 '당파성의 문학'으로 요약되는 논리를 전개한 소장파의 중심인물은 안막·임화·김남천·권환 등이다.

그러나 카프는 1931년 제1차, 1934년 제2차 검거사건으로 사실상 활동이 중지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1935년 5월 21일 경기도 경찰부에 해산계를 제출함으로써 해산되고 말았다. 당시 주요 활동 근거지였던 카프의 해산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끝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후 더이상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은 전개되지 못하고 전향논의만 뒤따랐다.

마르크스주의 문학론을 바탕으로 하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민족주의문학파 및 해외문학파와 많은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자체 내의 논의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문학비평). 박영희와 김기진 사이의 내용·형식논쟁, 아나키스트와의 논쟁, 목적의식논쟁, 〈낙동강〉(조명희 지음)의 평가를 둘러싼 논쟁, 대중화논쟁, 농민문학논쟁, 물논쟁, 창작방법논쟁 등이 그것이다.

내용·형식논쟁은 박영희의 작품을 둘러싸고 김기진과 박영희·양주동 등이 참가한 논쟁으로 문학에서 내용과 형식은 변증법적인 관계에 놓인다는 원론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무정부주의자와의 논쟁은 목적의식론과 함께 전개되어 무산계급의식을 드높이면서도 예술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무정부주의 쪽의 주장에 대해 문학의 정치성을 앞세운 소장파가 카프의 주도권을 형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낙동강〉을 둘러싼 논쟁과 물논쟁은 구체적 작품을 대상으로 전개된 논쟁이어서 주목된다.

특히 물논쟁은 조선의 현실을 문제삼아 리얼리즘에 대한 인식을 높인 최초의 논쟁이라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대중화논쟁은 내용·형식논쟁에 이어지는 것으로 문학의 당파성을 파기한 김기진의 논리 대신 그것의 관철을 주장한 소장파의 견해가 받아들여져 볼셰비키화로 이어졌다. 창작방법논쟁은 볼셰비키화 단계의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 사회주의 리얼리즘 등으로 중심이 변화하면서 계속되었다.

이 논쟁은 리얼리즘에 대한 깊이를 더해주었으나 한편으로는 전향의 빌미로 이용되기도 했다. 따라서 위의 논쟁들은 문학에서의 내용과 형식의 관계 등 원론적인 문제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 나갔을 뿐만 아니라, 반영론이나 당파성 등의 개념을 이해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보다 높은 수준에 오를 수 있도록 했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여러 논쟁과 더불어 작품에서도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시의 경우 임화·김창술·박아지·박세영 등이 초기의 생경한 구호 차원에서 벗어난 본격적인 프롤레타리아 시를 창작하기 시작했다. 특히 임화는 〈네거리의 순이〉(조선지광, 1929. 1)·〈우리 오빠와 화로〉(조선지광, 1929. 2) 등에서 드러나듯 '단편서사시'라는 형식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시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소설의 경우, 프롤레타리아 문학 초기에 해당하는 신경향파 시기의 작품은 2가지 경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첫째, 현실의 구체적인 분석 대신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를 이분법으로 나누는 박영희적 경향이다. 박영희의 〈사냥개〉로 대표되는 이 경향은 현실성이 결여된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추상적인 이상향을 그리는 관념적 성격이 강하다. 둘째, 당시 농촌의 고통받는 현실을 그리되 전망을 획득하지 못하는 최서해적 경향이다.

이기영의 초기 작품과 최서해의 작품으로 대표되는 이 경향은 현실 속에서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해 살육과 방화를 일삼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와 같은 두 경향은 〈낙동강〉을 쓴 조명희에 이르러 어느 정도 극복되었으며, 이후 〈민촌〉·〈농부 정도공〉·〈서화〉 등을 쓴 이기영, 〈과도기〉의 한설야, 〈인간문제〉의 강경애 등에 의해 한층 높은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이기영은 〈고향〉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소설의 최고봉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편 희곡에서도 송영·김영팔 등이 상당수의 작품을 창작했다.

의의

1925~35년 한국문단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의의는 첫째, 문학에 과학주의를 도입·확립시켰다는 데 있다.

종래까지의 한국문학은 뚜렷한 문학관이 없었고, 더구나 비평에서는 방법론에 대한 자각이 없었는데,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식민지 현실에 적합했는지의 여부를 떠나 문학의 근대화로서 과학주의를 도입한 것은 커다란 공적임에 틀림없다. 둘째, 대중개념을 도입한 점이다. 카프가 자신의 문학적 성과를 대중에게로 돌리고, 문학과 대중개념을 그토록 접근시키려 한 사실은 중요한 것이다. 셋째, 논쟁의 확립을 들 수 있다.

특히 이들의 논쟁은 하나의 문제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논쟁 때마다 거의 전문인이 동원된 점은 과거의 논쟁이 몇몇 문인들의 감상적·인상적인 평을 늘어놓는 데 그친 것과는 대조적이다. 넷째, 문예시평이란 이름의 작품평에서 민족과 개인과 계급으로서의 총체적인 사회비평을 시도한 점이다. 이것은 문학이 문단 중심이 아니라 사회 중심임을 증명하는 예이다. 이러한 점은 정치적 운동의 길이 막혀버린 식민지 조선의 특수성에 기인된 것이라 보여진다.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