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

임화

다른 표기 언어 林和 동의어 림인식, 林仁植, 임화, 林華, 임다다, 林多多, 김철우, 金鐵友, 아호, 雅號, 쌍수대인, 雙樹臺人, 성아, 星兒, 청로, 靑爐
요약 테이블
출생 1908. 10. 13, 서울
사망 1953. 8. 6, 평양
국적 한국

요약 시인. 일제 강점기 및 8·15해방 직후에 활동한 사회주의 문예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대표작으로 <우리 오빠와 화로>, <현해탄>이 있다.

임화(林和)
임화(林和)

일제 강점기 및 8·15해방 직후에 활동한 사회주의 문예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본명은 인식(仁植). 필명은 청로(靑爐)·임화(林化 또는 林華)·성아(星兒)·김철우(金鐵友)·쌍수대인(雙樹臺人).

서울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소년시절을 유복하게 보냈다. 1921년 보성중학교에 입학해 이상·조중곤·윤기정 등과 사귀었으며, 문학에 흥미를 느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보성중학교를 중퇴한 뒤부터이다.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가입해 1928년 중앙위원이 되었고, 그해 〈유랑〉·〈혼가 昏街〉 등의 영화에 주연배우로 출연했다(→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이듬해 박영희의 후원으로 연극공부를 하기 위해 도쿄[東京]로 유학을 갔으나 일본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사회과학에 관한 책만 탐독했고 김남천·안막·한재덕·이북만 등과 함께 '무산자사'에서 활동했다. 1931년 귀국해 이북만의 누이 이귀례와 결혼했으며, 그해 KAPF 제1차 검거사건 때 검거되었다가 9월경에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1932년 4월 KAPF 중앙위원회 서기장이 되었고, 기관지 〈집단〉의 책임편집을 맡아보았다. 같은 해 KAPF 제2차 검거사건 때도 검거되었으나 폐결핵의 악화로 석방되었다. 1935년 김남천과 함께 경기도 경찰국에 KAPF 해산계를 제출하고, 그해 8월에는 요양을 위해 마산으로 내려가 1937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후에 여기서 만난 지하련과 재혼했다. 1937년 학예사를 대리 경영했고, 〈사해공론〉·〈인문평론〉의 편집에도 참여했다. 1940년초에는 고려영화사 문예부 촉탁으로 근무했고, 1943년 조선영화 문화연구소의 촉탁으로 있으면서 〈조선영화연감〉·〈조선영화발달사〉를 편집했다. 8·15해방 직후 김남천·이원조·이태준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했으나 이기영·한설야·안막 등이 조직한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과 대립이 일어나자, 1946년 2월 박헌영의 지령을 받고 두 단체를 통합해서 조선문학가동맹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조선문학가동맹). 1947년말 월북하여 황해도 해주에 머물면서 조소문화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6·25전쟁 때 북한의 종군작가단으로 서울에 온 벅찬 감동을 시 〈너 어디 있느냐?〉와 인민군이 후퇴해 평안북도까지 쫓겨간 심정을 시 〈바람이여 전하라, 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 피 위에〉 등에 나타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이 문제가 되어 1953년 남로당 계열이 숙청될 때, '미제의 고용 스파이'라는 죄명으로 이승엽 등과 함께 사형당했다.

문학세계

1926년 〈매일신보〉에 시 〈무엇 찾니〉·〈서정소시 抒情小詩〉 등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다. 초기에는 사회적·예술적 전통을 부정하고 반이성·반예술을 내세우는 다다이즘에 열중하는 듯했으나, 1926년말 KAPF에 가입하면서 계급문학론으로 옮겨갔다(→ 프롤레타리아 문학). 당시 KAPF 내부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무정부주의 문학론과의 논쟁에 참여한 것은 그가 계급문학론으로 전향했음을 입증해 준다.

1929년 시 〈네거리의 순이〉(조선지광, 1929. 1)·〈우리 오빠와 화로〉(조선지광, 1929. 2) 등의 '단편서사시'를 발표하여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 시인의 자리를 굳혔다. 그가 한편으로 문학비평에 참여한 것은 김기진의 〈대중화론〉(동아일보, 1929. 4)에 대하여 쓴 〈탁류에 항(抗)하야〉(조선지광, 1929. 8)가 시발점이다. 이후 〈김기진군에게 답하는〉(조선지광, 1929. 11)을 발표해 김기진의 대중화론은 투쟁정신을 제거한 타협주의라고 비판했다.

1933년에는 김남천의 소설 〈물〉과 이기영의 소설 〈서화 鼠火〉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김남천과 벌인 '물·서화논쟁'을 통해 과거 KAPF 지도자들이 지녔던 도식성과 사회적 편향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1934년에는 낭만주의론을 발표해 KAPF 내부의 우익적 일탈과 객관주의적 편향을 비판했으며, 이듬해 KAPF가 해산되어 프롤레타리아(프로) 문학이 위기에 처하자 프로 문학의 발생 및 발전과정에 대한 문학사 서술에 관심을 갖고 〈조선신문학사론 서설〉(조선중앙일보, 1935. 10. 9~11. 3)을 발표했다.

1938년에는 프로 문학이 퇴조한 이후의 한국문학의 경향을 세태소설(世態小說)과 내성소설로 규정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본격소설론을 제기해 사실주의론을 구체화시켰다. 그가 당시 수준 높은 사실주의론을 수립할 수 있게 된 것도 이러한 이론적 노력이 바탕이 되었으며, 그의 사실주의론은 세계관과 방법의 변증법적 연관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나온 것으로서 근대문예비평사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올렸다.

시집으로 〈현해탄〉·〈찬가〉(1947) 외에 6·25전쟁 때 전선문고로 펴낸 〈너 어디 있느냐〉(1950)가 있고, 평론집으로 〈문학의 논리〉(1940)가 있다. 6·25전쟁 중에 북한에서 단행본 〈조선문학〉(1951)을 간행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