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진

김기진

다른 표기 언어 金基鎭 동의어 팔봉, 八峰, 구준의, 具準儀, 긔진, 동쵸, 동초, 東初, 여덟뫼, 팔봉산인, 八峰山人, 팔봉생, 八峰生
요약 테이블
출생 충북 청원, 1903. 6. 29
사망 1985. 5. 8, 서울
국적 한국

요약 문학평론가·소설가·시인. 우리나라 최초로 프로 문학의 이론을 내세웠으며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의 실질적 지도자로 활동했다.

김기진(金基鎭)
김기진(金基鎭)

본관은 안동. 필명은 팔봉·팔봉산인·동초·여덟뫼. 우리나라 최초로 프로 문학의 이론을 내세웠으며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의 실질적 지도자로 활동했다.

함경도 군수였던 아버지 홍규와 어머니 김현수(金現洙) 사이의 4남매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5세 때 형 복진과 함께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한 뒤, 형과는 친구처럼 붙어다녔다. 같은 해 아버지가 춘천군수로 옮김에 따라 가족이 서울 소격동으로 이사했다. 8세 때 다시 아버지를 따라 황간으로 옮겨가 황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형이 친구들에게 구타당한 사건으로 함께 자퇴했다. 10세 때 아버지가 영동군수로 옮기자 다시 영동으로 이사가 영동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들어갔다. 1916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박영희와 사귀게 되었다.

1919년 3학년 학기말시험이 끝나고 탑골공원에 나가 3·1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신문을 인쇄해서 돌리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배재고보에서의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으나 1920년 학교를 졸업하지도 않은 채 박영희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1년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학부에 입학, 학과 공부보다는 아소 히사시[麻生久]로부터 노동운동의 중요성과 러시아 문학에 대해 배웠다.

1922년 박승희·이서구·김복진 등과 토월회를 만들고, 이듬해 귀국하여 토월회 귀국공연을 준비했으나, 9월 토월회 2차 공연을 끝으로 탈퇴했다. 그뒤 박영희·안석주·이익상·김복진 등과 '파스큘라'를 만들어 '인생을 위한 예술'을 내세우는 문예운동을 벌였다.

1924년 매일신보사에 취직, 1925년 시대일보사로 옮겼다. 그해 8월 일본에 있을 때 존경했던 나카노 니노스케[中西伊之助]가 우리나라에 오자 '파스큘라'와 '염군사'를 합쳐 'KAPF'를 만들었다. 1926년 박영희와 내용·형식논쟁을 벌였다. 이듬해 논쟁이 끝난 후 KAPF의 주도권은 박영희에게 넘어가고 곧이어 임화·윤기정 등의 소장파가 KAPF를 장악했다. 1928년 함경도 이원에 정어리공장을 차렸다가 실패했는데, 이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장편 〈해조음 海潮音〉을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1929년 임화와 예술대중화논쟁을 벌이면서 평론을 많이 썼다.

1930년 중외일보·조선일보 사회부장을 지냈고, 1931년 KAPF 제1차 검거사건 때 종로경찰서에서 자술서를 쓰고 10일 만에 풀려났다. 1934년 금광사업에 실패한 뒤 형과 함께 인쇄소 애지사를 세워 〈청년조선〉 창간호를 펴냈으나, 러시아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다는 혐의로 형제가 동대문경찰서에서 보름 동안 갇혀 지냈다. KAPF 제2차 검거사건 때는 형과 함께 전북경찰서에 70여 일 구금되었다.

1945년 애지사를 다시 세워 인쇄·출판에만 전념했다. 6·25전쟁 때 애지사 인쇄공들이 고발해 인민재판에서 즉결처분을 받았으나 가까스로 살아났다. 그뒤 대구로 피난해 종군작가로 입대했으며, 1953년까지 〈전선문학〉에 글을 발표했다. 1954~57년 수필과 문단회고의 글을 주로 썼다. 1960년 〈경향신문〉 주필, 1961년 재건국민운동 중앙회장을 지냈다.

문학세계

1920년 〈동아일보〉에 시 〈가련아〉를 발표한 뒤, 주로 〈개벽〉에 글을 발표했다.

이 잡지에 실린 작품으로 1923년 수필 〈프로모나드 상티망탈〉(7월호), 시 〈애련모사 愛戀慕思〉(8월호), 평론 〈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9월호) 등이 있으며, 같은 해 〈백조〉에 시 〈한 갈래의 길〉·〈한 개의 불빛〉(9월호) 외에 4편의 시를 발표했다. 〈한 개의 불빛〉에서는 지식인과 가난한 사람들과의 동지애를 언급했다. 이렇듯 그가 1920년대에 발표한 시에는 지식인들이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민중과 하나가 되라고 주장한 것이 많았다.

소설로는 〈개벽〉에 〈붉은 쥐〉(1924. 11)·〈불이야! 불이야!〉(1925. 1)·〈젊은 이상주의자의 사(死)〉(1925. 6~7)·〈몰락〉(1926. 1) 등과 전문 삭제된 〈Trick〉을 발표했다.

〈Trick〉은 일본에 있을 때 〈개조〉에 실었으나 빛을 보지 못한 작품이다. 〈붉은 쥐〉는 스스로가 데뷔작으로 내세우는 소설로, 신경향파소설의 최초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허위와 모순으로 가득찬 현실에 대한 비판은 잘 나타나 있지만, 구체적이지 못하고 관념에 치우쳐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관념적인 서술태도에 대한 지적은 〈젊은 이상주의자의 사〉와 〈몰락〉에도 적용되었다.

그밖의 작품으로는 〈본능의 복수〉(문예운동, 1926. 1)·〈황원행 荒原行〉(동아일보, 1929. 6. 8~10. 21)·〈봄이 오기 전〉(신가정, 1934. 3)·〈심야의 태양〉(동아일보, 1934. 5. 3~9. 19)·〈통일천하〉(동아일보, 1954. 4~1955. 10) 등이 있다.

그는 문단을 진단(診斷)하는 평론을 많이 썼는데, 1920년대 초반 〈개벽〉에 프로 문학의 씨앗을 뿌리는 역할을 한 〈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또 다시 클라르테에 대하여〉(1923. 11) 등과 〈마음의 폐허〉(1923. 12)·〈지배계급 교화, 피지배계급 교화〉(1924. 1)·〈금일의 문학, 명일의 문학〉(1924. 2) 등을 발표했다.

1920~30년대 월평(月評)과 현장비평을 활발히 전개했으며, 문단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전망한 평론도 여러 편 발표했다.

또한 그는 문단에서 여러 차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박영희와 벌인 '내용·형식논쟁', 임화와 벌인 '예술대중화논쟁' 등은 대표적인 것이다. '내용·형식 논쟁'은 그가 박영희의 소설 〈전투〉(개벽, 1925. 1)에 대해 "설교체로 지문을 삽입해놓은", "노골적으로 주관을 나타내려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박영희의 작품이 지나치게 관념적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박영희는 〈투쟁기에 있는 문예비평가의 태도〉(조선지광, 1927. 1)에서 김기진의 주장은 "예술지상적·초계급적·개인주의적"인 것이라고 반박하고, 그는 프로 문학가나 프로 비평가로서는 자격이 없는 부르주아 비평가, 예술가적 비평가라고 몰아쳤다.

둘 사이의 논쟁은 그후 계속 이어지다가 형 김복진의 충고를 받아들인 김기진이 스스로 철회함으로써 끝났다.

예술대중화 논쟁은 〈통속소설고〉·〈대중소설론〉·〈프로 시가(詩歌)의 대중화〉(문예공론, 1929. 6) 등의 글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그는 아는 것이 없는 대중을 깨어난 프롤레타리아트로 만들기 위해 소설의 수준을 낮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임화는 〈탁류에 항(抗)하여〉(조선지광, 1929. 8)·〈김기진 군에게 답함〉(조선지광, 1929. 11) 등의 글에서 김기진의 태도를 "전면 무장해제적 오류"라고 공격했다.

말하자면 김기진은 운동의 대중화 또는 양적 팽창을 우선시했던 것이며, 이에 반해 임화는 현실보다는 운동의 원칙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김기진이 내세우는 '대중소설론'이 통속소설과 비슷한 작품을 쓰도록 부추겨서 프로 문학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작품집에는 소설집으로 〈청년 김옥균〉(1936)·〈해조음〉(1936)·〈심야의 태양〉(1952)·〈통일천하〉(1956)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 〈심두잡초 心頭雜草〉(1954)·〈김팔봉수필집〉(1958) 등이 있다.

198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김팔봉문학전집〉(전7권)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