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월회

토월회

다른 표기 언어 土月會

요약 박승희가 제안하여 창립되었으며, 창립동인은 김기진·김복진·박승목·이서구·김을한·이제창 등이다. 토월회라는 명칭은 '현실을 도외시하지 않고 이상을 좇는다'라는 뜻이다. 1923년 7월 조선극장에서 제1회 공연을 가졌다. 레퍼토리가 근대극이었다는 점과 무대장치가 사실적이었다는 점에서 근대적 신극운동의 시작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2회 공연 이후 재정적 문제와 박승희의 독주가 빚은 갈등으로 많은 단원들이 탈퇴하자, 토월회는 제3회 공연부터는 직업극단으로 변신했다. 토월회는 시대의 변천과 자체 역량의 쇠진으로 1931년 해산되었다. 이후 박승희는 1932년 태양극장이라는 유랑극단을 만들어 1940년까지 전국을 순회했고, 1946년 옛 단원들을 모아 토월회 재건공연을 했지만 경제적인 사정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박승희가 제안하여 창립총회를 가졌는데, 창립동인은 김기진·김복진·박승목·이서구·김을한·이제창 등 7명이다.

뒤에 연학년·이수창이 가입했고, 객원으로 시인 김명순과 임노월이 가담했다. 토월회라는 명칭은 '현실(土)을 도외시하지 않고 이상(月)을 좇는다'라는 뜻이다. 1923년 7월 4~5일 조선극장에서 제1회 공연을 가졌다. 이때의 레퍼토리는 유진 필롯의 〈기갈 飢渴〉, 안톤 체호프의 〈곰〉, 버나드 쇼의 〈그 남자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어떻게 거짓말을 하였나〉, 창작극인 박승희의 〈길식 吉植〉 등 단막극 4편이었다.

레퍼토리가 근대극이었다는 점과 무대장치가 사실적이었다는 점에서 신파(新派)에서 벗어난 근대적 신극운동의 시작이었다는 의의를 인정받고 있다.

같은 해 9월 18일부터 1주일간 백조사의 후원으로 조선극장에서 올려진 제2회 공연은 톨스토이의 〈부활〉(4막), 마이어 푀르스터의 〈알트 하이델베르크〉(5막), 스트린드베리의 〈채귀 債鬼〉를 공연했고, 제1회에서 공연했던 〈그 남자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어떻게 거짓말을 하였나〉의 주인공 이름을 따서 명명한 〈오로라〉를 공연했다.

제2회 공연에 상연된 서구 근대극은 지식층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제2회 공연이 끝난 후 재정적 문제와 박승희의 독주가 빚은 갈등으로 많은 단원들이 탈퇴하자, 토월회는 동인제도에서 벗어나 제3회 공연부터는 예술과 영리를 동시에 추구하는 직업극단으로 변신했다. 박승희를 회장으로 하고 홍사용(문예부)·원우전(미술부)·정원택(경리부)·이백수(출연부)가 결합해 부서별 체계를 갖게 되었다. 1924년 1월 22일 YMCA 강당에서 제3회 공연으로 박승희의 무용가극 〈사랑과 죽음〉, 홍사용의 〈회색의 꿈〉을 상연했고, 제4회 공연은 우미관에서 〈부활〉·〈사랑과 죽음〉을 공연했다.

토월회 창립 1주년 기념 공연으로 1924년 6월말부터 7월 5일까지 〈부활〉·〈카르멘〉·〈장한몽〉 등을 무대에 올렸다.

1925년 3월 토월회는 극단제도를 개혁하여 합자회사로 만들고, 박승희는 유산을 정리하여 광무대를 1년간 토월회 전속극장으로 계약했다. 1925년 4월 10일부터 박승희의 희극 〈산서낭당〉과 각색한 비극 〈희생하든 날 밤〉(다눈치오 작), 그리고 광무대 노래꾼들의 독창·입창(立唱)·좌창(坐唱)·승무로써 첫 막을 열었다.

이때 이서구가 전무를 맡았고 복혜숙·석금성을 맞아들여 각각 80원과 60원의 월급을 지급했는데, 이것이 극단에서 여배우에게 월급을 주게 된 효시였다. 또한 연구생제도를 통해 신인 배우를 모집했는데, 170여 명의 응모자 중 서일성·이운방·이진원·이용구·서월영·양백명·박제행 등이 선발되어 나중까지 연극영화인으로 활약했다. 간부급 배우로는 이백수·이소연·윤성묘 등이 있었고, 각본은 대부분 박승희에 의존했다.

이후 〈추풍감별곡〉·〈시들은 방초〉·〈국교 단절〉·〈장화홍련전〉·〈무정〉 등의 공연을 했지만, 경영난은 더욱 가중되기만 했다. 그래서 전통적 작품에서 돌파구를 찾기로 하고 명창 김창룡의 창을 곁들인 〈춘향전〉을 상연했는데,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11월 16일부터 1개월 동안 지방순회공연을 했다. 그무렵 당시 유명한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을 맞아들여 1926년 2월 6일부터 〈동쪽길〉·〈놓고 나온 모자〉·〈밤손님〉 등을 상연하고 이어 〈카르멘〉·〈신데아보로〉·〈곰〉 등을 무대에 올렸다.

그러나 김을한을 비롯한 단원들이 극단운영상의 문제와 박승희의 독주에 반발하여 탈퇴했고, 이후 먼저 탈퇴한 김기진·김복진 등과 백조회(白鳥會)를 발족했다. 결국 토월회는 광무대와의 전속 계약을 1년도 못 채우고 1926년 2월 24일 제56회 공연을 끝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2년 뒤인 1928년 10월 박승희의 〈이 대감 망할 대감〉·〈사(死)의 승리〉·〈혈육〉, 홍사용 번안의 〈5남매〉·〈추풍감별곡〉의 레퍼토리로 재기공연을 가졌지만 별 성과를 얻지 못했다.

1929년 가을 찬영회 주최로 조선극장에서 희가극 〈즐거운 인생〉·〈목신(牧神)의 작란〉, 악극 〈초생달〉으로 2번째 재기공연을 가졌다. 이어서 박승희의 〈아리랑고개〉를 상연했으나 상연 도중 발생한 광주학생운동 관계 '삐라사건'으로 일제의 감시를 더욱 심하게 받게 되었다. 이때 토월회는 조선극장과 1년 계약을 맺고 주역진도 전옥·강홍식 등으로 바꾸어 〈불여귀〉·〈초생달〉·〈즐거운 인생〉·〈여군도〉·〈목신의 작란〉·〈희생〉·〈엉터리 김주부〉 등을 계속하여 무대에 올렸다.

그러나 토월회는 시대의 변천과 자체 역량의 쇠진으로 1931년 해산되고 말았다.

이후 박승희는 1932년 2월 태양극장이라는 유랑극단을 만들어 1940년까지 전국을 순회했고, 1946년 옛 단원들을 모아 토월회 재건공연으로 박승희의 〈40년〉·〈의사 윤봉길〉 등을 상연했지만 경제적인 사정으로 해산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