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븐 사우드

이븐 사우드

다른 표기 언어 Ibn Sa'ud 동의어 ⁽Abd al-⁽Azīz ibn ⁽Abd ar-Raḥmān ibn Fayṣal ibn Turkī ⁽Abd Allāh ibn Muḥammad āl Sa⁽ūd
요약 테이블
출생 1880경, 아라비아 리야드
사망 1953. 11. 9, 사우디아라비아 앗타이프
국적 사우디아라비아

요약 사우디아라비아라는 현대국가를 창건하고 유전개발을 시작한 이슬람의 종교지도자이자 부족장(→ 아라비아).
정식 이름은 ⁽Abd al-⁽Azīz ibn ⁽Abd ar-Raḥmān ibn Fayṣal ibn Turkī ⁽Abd Allāh ibn Muḥammad āl Sa⁽ūd.

목차

접기
  1. 청년 지도자 시절
  2. 이븐 사우드의 정책과 종교의 역할
  3. 사우디아라비아의 창건
이븐 사우드(Ibn Sa'ud)
이븐 사우드(Ibn Sa'ud)

청년 지도자 시절

사우드가(家)는 1780~1880년 아라비아의 많은 지역들을 통치했다.

그러나 이븐 사우드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그의 가족은 경쟁자들인 라시드가에게 추방당하여 쿠웨이트에서 돈 한푼 없는 망명객이 되었다. 1901년 21세의 이븐 사우드는 40명의 낙타부대를 이끌고 대담하게 자기 가문의 옛 영지를 탈환하기 위해 쿠웨이트를 출발했다. 가문의 옛 수도 리야드에 도착한 그들은 야음을 틈타 시내로 몰래 잠입했다(1902. 1). 라시드가의 총독은 성채에서 잠을 자지만, 매일 아침 날이 밝으면 그곳에서 나왔다.

이븐 사우드는 총독이 나타날 때까지 숨어서 기다리다 부하들과 함께 달려들어 그를 죽이고 성채를 점령했다. 이러한 수훈은 그의 옛 왕조의 지지자들을 분기시켜 그들은 이같이 매력적인 지도자 밑으로 다시 모여들었고 2년간의 습격과 전투 끝에 이븐 사우드는 중앙 아라비아의 반을 다시 정복했다. 그러나 이븐 라시드가 투르크에 도움을 간청하자, 투르크는 군대를 파견했다(오스만 제국). 이븐 사우드는 파견된 투르크군에 의하여 1904년 6월 15일 쓰라린 패배를 당했다.

그러나 그는 중앙 아라비아를 내어주지 않고 곧바로 병력을 재조직하여 1907~12년 산발적인 전투를 계속했다. 투르크 군대는 병참선이 달리자 결국 철수했다.

이븐 사우드의 정책과 종교의 역할

이븐 사우드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몇 해 동안 극단적인 이슬람 복고주의인 와하브주의에 대한 그의 선대 왕조의 지원 정책을 부활시켰다.

실제로 이븐 사우드는 헌신적이고 엄격한 이슬람교도였다. 그는 〈코란〉을 문자 그대로 신의 말씀으로 믿었고 그의 삶은 〈코란〉에 의해 통제되었다. 그는 종교적 광신주의가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이러한 종교적 열광을 일부러 조장하여 부족 속에 호전적인 종교조직인 이흐완(종교상의 형제들)을 만들었다.

이와 같이 열광적인 형제관계는 이븐 사우드의 추종자들에게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아랍 세력들과 대적하여 그들을 몰살하도록 고무했다. 또한 이븐 사우드는 와하브주의를 이용하여 많은 유목부족을 보다 직접적인 통제 아래 둘 수 있었다. 이븐 사우드는 종교 지도자들을 설득하여 유목을 포기하고 오아시스 주변에 주택을 짓고 정착하는 것이 모든 와하브주의자들의 종교적 의무라고 선언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정착한 그들은 보다 쉽게 이븐 사우드의 군대에 징집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비현실적이었다.

양떼를 팔아버린 유목민들은 대개 경작법을 몰랐기 때문에 몹시 궁핍해졌다. 보다 광신적인 부족들은 궁핍할수록 더욱 습격을 일삼게 되었는데 이때에 이븐 사우드는 그들이 이븐 라시드에게 복종하는 부족을 약탈하도록 은근히 부추겼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이븐 사우드는 영국과 맺은 조약(1915. 12)에서 보호령의 지위를 수락하고, 투르크의 지원을 받고 있던 이븐 라시드와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영국제 무기와 매달 5,000파운드의 군사원조를 영국 정부로부터 1924년까지 계속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븐 사우드는 원조가 불충분하다고 주장하면서 1920년까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1920~22년에 그는 이븐 라시드와 접전을 벌여 라시드가의 지배를 제압하고 영토를 2배로 늘렸다. 그러나 그의 세입은 현저한 증가 없이 여전히 빈약했다.

이제 이븐 사우드는 홍해 연안의 헤자즈 지역을 제외한 중앙 아라비아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헤자즈는 메카의 샤리프 후사인의 영토였다. 샤리프 후사인은 전쟁중에 헤자즈의 왕이 되었고 1924년에 스스로 칼리프(이슬람 공동체의 장)라고 선언했다.

샤리프 후사인의 아들인 아브둘라는 1921년 트란스요르단의 통치자가 되었고, 또다른 아들 파이살은 이라크의 왕이 되었다. 이와 같이 경쟁관계에 있는 왕국에 의해 포위되는 것이 두려워 이븐 사우드는 헤자즈를 침공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그는 권력의 절정기에 있었다. 강렬한 개성과 놀라운 매력에 이끌린 그의 부하들은 모두 그를 헌신적으로 따랐다. 노련한 정치가였던 그는 종교 지도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그들은 항상 그에게 지지를 보냈다.

이븐 사우드와 파이샬
이븐 사우드와 파이샬

이븐 사우드는 그의 다른 아랍 경쟁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흐완 조직을 이용했다. 그는 이웃 도시들을 공격하도록 그들을 보낸 다음 그곳에 제국주의적 이권이 얽혀 있는 영국측에게는 그 습격이 자신의 명령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통지했다. 1924년 이흐완은 메카를 점령했고 헤자즈 지역은 이븐 사우드의 영토가 되었다.

트란스요르단과 이라크는 영국과 조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때쯤에는 이븐 사우드와 겨눌 경쟁세력은 더이상 없었다.

그러나 이흐완은 와하브파가 아닌 이슬람교도는 이단자라고 들어왔다. 이븐 사우드가 더이상의 공격을 금지하자 그들은 그가 지금까지 해온 말들을 인용하면서 그가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1927년 이흐완은 이븐 사우드의 희망과는 반대로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들은 영국 비행기에 의해 격퇴되었고 동시에 그들에 대한 이븐 사우드의 권위 또한 무너졌다. 1929년 3월 29일 시빌라의 전투에서 이븐 사우드는 자신이 훈련시킨 광신자 집단인 이흐완을 쳐부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창건

이 전투가 끝난 이후 새로운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이븐 사우드의 목표는 정복이 아니라 통치였다. 1932년 그는 자신의 영토를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에 공식적으로 통합시켰다. 절대군주가 된 그는 정규적인 관리제도나 전문적인 행정관들을 두지 않았다. 모든 결정은 그가 내리거나 특별한 임무 수행을 위하여 그가 개인적으로 위임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국고는 거의 비어 있었고 이븐 사우드는 재정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1933년 5월 그는 미국의 한 석유회사와 최초로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 회사는 1938년 3월까지 석유를 발견하지 못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작업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따라서 이븐 사우드는 다시 거의 무일푼이 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고 종전 무렵에 석유 채굴이 재개되었다. 1950년까지 이븐 사우드는 총 20만 달러 정도를 받았다. 3년 후쯤부터는 매주 약 250만 달러가 들어왔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븐 사우드에게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그 돈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아무런 구상도 갖지 못했다.

그는 그가 싫어했던 모든 일들이 승리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보고 있어야 했으며, 그의 엄격한 종교적 입장은 손상되었다. 격리되고 궁핍했으며 힘겨웠으나 이상주의적이었던 아리비아의 생활은 끝나고 있었다. 엄청난 돈에 이끌려 반은 사기꾼과 같은 사람들이 중동지역의 근엄한 종교적 성지인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이븐 사우드는 재정적 협잡꾼들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그의 말년은 육체적·정신적으로 매우 불행한 생활로 점철되었고 1953년 앗타이프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