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스터

웹스터

다른 표기 언어 Daniel Webster
요약 테이블
출생 1782. 1. 18, 미국 뉴햄프셔 솔즈베리
사망 1852. 10. 24, 매사추세츠 마시필드
국적 미국

요약 연방대법원에서 저명한 변호사로 활약했고, 미국 하원의원·상원의원 및 국무장관을 지냈다. 열렬한 국민주의자이자 잭슨 대통령의 농업주의시대에 기업의 이익을 옹호한 인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807년 포츠머스에서 유명한 변호사로 활약했으며, 1812년 연방파 후보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823~27년에는 연방하원의원이 되었다. 그는 연방대법원에 올라간 중요 사건을 잇달아 맡으면서 대법원장인 존 마셜의 판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헌법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다. 1827년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웹스터는 잭슨과 민주당에 반대하던 휘그당의 지도자로서 윌리엄 헨리 해리슨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고, 1841년 국무장관에 임명되었다. 해리슨이 죽자 타일러와 제휴해 타일러-웹스터 정당을 만들고자 했으나 좌절되고, 1843년 장관직을 사임했다. 그는 1850~52년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 내각에서 국무장관으로 일하며 다시 한 번 대통령에 대한 꿈을 품었으나 끝내 좌절되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어린시절과 초기활동
  3. 변호사 및 웅변가로서의 부상
  4. 헌법 옹호
  5. 휘그당의 지도자
  6. 지역간 타협의 옹호
  7. 웹스터에 대한 평가
웹스터(Daniel Webster)
웹스터(Daniel Webster)

개요

연방대법원에서 저명한 변호사로 활약했고, 미국 하원의원(1813~17, 1823~27)·상원의원(1827~41, 1845~50) 및 국무장관(1841~43, 1850~52)을 지냈다.

열렬한 국민주의자이자 잭슨 대통령의 농업주의시대에 기업의 이익을 옹호한 인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어린시절과 초기활동

웹스터는 뉴햄프셔 주의 개척지 마을 솔즈베리에서 10남매 가운데 아홉째로 태어났다.

독립전쟁 참전용사인 그의 아버지 에버니저 웹스터는 농부이자 선술집 주인으로서 마을 유지였다. 얼굴이 까무잡잡해서 '꼬마 검둥이 댄'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 허약한 소년은 부모와 형 및 누나들의 귀여움을 받았고, 형과 누나 몇몇은 어린 나이의 그에게 글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자주 낭독과 암송으로 가족과 선술집 손님들을 즐겁게 했다. 나이가 들자 마을에 하숙하는 선생을 찾아가 공부했는데, 선생이 마을 이집저집으로 하숙을 옮길 때마다 따라다녀야 했다.

14세 때 그는 엑서터의 필립스 아카데미에 몇 달 다닌 뒤, 15세 때 다트머스대학에 들어가 대중연설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졸업 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법전을 읽었고, 보스턴으로 가서 유명한 변호사 사무실에 들어가 공부했다. 그는 고향 근처에 사무실을 내고 변호사 업무를 시작했지만 1807년에 포츠머스로 이주하여 목사의 딸인 그레이스 플레처와 결혼했고, 곧이어 이 번창하는 항구도시에서 유명한 변호사 대열에 올랐다.

웹스터는 영국 및 프랑스와 무역하는 포츠머스의 선주 및 상인들과 이해관계를 같이했다.

미국 상선이 나폴레옹 전쟁을 치르는 양국에 의해 이따금 나포되는 경우가 있었으나 이들은 이 두 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다. 미국 정부는 해외무역을 제한하거나 심지어는 완전히 중단함으로써 영국과 프랑스에 보복하려고 했지만, 포츠머스의 사업가들은 이같은 연방 정부의 시도에 반대했다. 웹스터는 그들의 대변자로서 제퍼슨 행정부의 출항 금지조치가 위헌이라고 비난했으며, 1812년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에도 반대했다.

같은 해 보수적이며 영국에 우호적인 연방파 후보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연방파는 강력한 중앙정부와 산업진흥정책을 지지했다. 그는 하원의원에 2번(1814, 1816) 더 당선되었는데, 하원에서 그는 사실상의 모든 전쟁법안을 저지하려고 애썼다. 그가 반대한 징병법안은 결국 부결되었다. 그는 징병제도에 대항하여 극단적인 주권(州權) 옹호론을 폈고, 주정부는 "주민(州民)과 자의적인 권력 사이에 끼어들" 신성한 의무가 있다고 말했을 때 연방법 거부를 시사하기까지 했다.

변호사 및 웅변가로서의 부상

1816년 웹스터는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좀더 발전가능성을 지닌 대도시 보스턴으로 이사했다.

그후 법정에서 이 도시의 주요사업가들을 대변했으며, 1823~27년에는 다시 연방하원의원으로 기업가들을 대변했다. 또한 그는 전국 최고의 보수를 받는 변호사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는 연방대법원에 올라간 중요 사건들을 잇따라 맡으면서 대법원장인 존 마셜의 판결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고, 마셜의 판결을 통해 헌법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다. '다트머스대학 대(對) 우드워드 판결'(1819)에서 그는 주 정부에 의한 사업 인가는 주 정부가 함부로 파기할 수 없는 계약이라고 주장했다.

'매컬럭 대 메릴랜드 판결'(1819)에서는 징세권이란 "파멸적인 힘"이기 때문에 주 정부는 연방정부 기관(이 경우에는 '미국 은행'의 한 지점)에 대해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기번스 대 오그던 판결'(1824)에서는 주 사이의 통상을 규정하는 연방의회의 권한은 주 정부가 침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연방정부의 권한을 확대하는 한편, 법인기업의 활동을 촉진하는 데 영향을 준 여러 소송사건의 변론에서 웹스터는 자신이 1812년 전쟁에 반대하며 내세웠던 주권 옹호론을 잊은 듯이 보였다.

헌법 옹호

그러나 그는 관세문제에 관해서는 여전히 헌법을 엄격하게 해석하여, 뉴잉글랜드 지방에 가장 중요한 상업적 이익을 해칠 수 있는 1816, 1824년의 보호관세에 반대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제조업자에 대한 이러한 지원책은 위헌일 뿐 아니라 부적당한 것인데, 왜냐하면 연방의회에 관세징수권이 부여된 것은 순전히 세입을 늘리기 위해서이며, 공장이 발전하면 사회에 위협적인 무산노동계급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고대와 근대의 정치 이론가들한테서 영감을 얻어, "재산을 얻으면 권력은 자연히 그리고 반드시 따라온다"고 선언했고, 광범위한 선거권이 안전하게 유지되려면 재산은 계속 분산되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런 생각을 여러 번 밝혔는데, '메이플라워호'가 북아메리카 최초의 영구 이주민을 싣고 플리머스에 닻을 내린 지 200년이 지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20년에 열린 기념식에서도 이런 생각을 토로했다. 한편 그는 1820년의 이 연설을 시작으로 공개행사에서 여러 번 연설하여 미국 최고의 웅변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1827년 매사추세츠 출신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아내와 함께 워싱턴으로 가던 중 아내가 죽었다.

수줍음 많고 평범한 여성이었던 그의 아내는 대체로 집안에서 다섯 아이를 돌보았지만, 어머니보다 오래 산 아이는 3명뿐이었다(웹스터보다 오래 산 아이는 하나뿐이었음). 2년 뒤 그는 47세의 나이로 뉴욕 상인의 딸인 31세의 아름답고 쾌활한 캐롤라인 르 로이와 결혼했다. 웹스터는 사치를 즐기고 지출 규모에 무관심했는데, 그의 2번째 아내는 첫번째 아내와는 달리 남편의 이런 성향을 별로 억제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매사추세츠 주에서 직물 공장이 성장하여 제조업의 비중이 크게 높아지자 웹스터는 1828년의 관세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때부터 그는 중요한 보호무역론자가 되어 자신이 일찍이 주장했던 관세 반대론을 반박하고 나섰다. 그는 연방의회의 통상 규제권에서 관세에 대한 합헌적 요소를 찾아내는 한편, 관세가 전체적인 번영을 자극함으로써 재산을 널리 분산시킬 것이라는 논리를 관세를 정당화할 사회적 근거로 내세웠다. 그러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민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관세 탓으로 돌렸고, 1830년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 상원의원 로버트 Y. 헤인은 존 C. 컬훈 부통령의 이론, 즉 각 주는 불쾌하고 위헌적인 법을 백지화할 수 있으며 최후의 수단으로 연방 탈퇴도 가능하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웹스터는 헤인에 대한 2번째 답변에서, 이른바 주권이라는 것에 대립되는 연방정부의 권한을 유창하게 옹호했다. 그는 "자유와 연방은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이며 떨어질 수 없다"는 호소로 연설을 맺었다. 이 연설 덕분에 그는 북부 전역 국민주의자들의 우상이 되었다. 1832~33년에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연방법 거부론의 창시자 존 C. 컬훈(부통령이었던 그는 당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를 대표하는 상원의원이었음)의 주도로 그 이론을 실행에 옮기려 하자, 웹스터는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정적이면서도 잭슨이 이런 기도를 저지하는 것에 대해 지지를 보냈다.

휘그당의 지도자

연방법 거부를 둘러싼 위기가 해소된 뒤 웹스터는 잭슨과 정치적 동맹을 맺기 위한 교섭을 벌였다.

이 동맹이 맺어졌다면 웹스터는 아마 잭슨의 후임자로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너무나 많은 문제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고, 특히 미국 은행 문제에서는 큰 의견 차이를 보였다(미합중국은행). 잭슨은 미국 은행이 위험하고 비민주적인 독점기업이라고 비난했지만, 웹스터는 미국 은행의 법률고문이자 보스턴 지점의 이사 자격으로 켄터키 주의 헨리 클레이와 함께 상원에서 미국 은행을 옹호했다.

클레이와 웹스터는 잭슨과 민주당에 반대하고 있던 다소 이질적 집단인 휘그당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휘그당은 미국 은행의 특허기간을 연장하는 데 실패했고, '은행전쟁'에서 패배를 맛보았다.

이로써 웹스터는 당시 인기를 얻지 못하던 미국 은행과 동일시되고 부자들의 벗으로 매도되었으며, 이 때문에 1836년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나선 휘그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자신의 출신 주인 매사추세츠에서만 승리했을 뿐이다. 그러나 휘그당은 오하이오 출신 전쟁 영웅인 윌리엄 헨리 해리슨을 대통령으로, 민주당원으로서 휘그당으로 돌아선 버지니아 출신 존 타일러를 부통령으로 당선시켰고, 1841년 웹스터는 국무장관에 임명되었다.

해리슨이 재임중 사망하자 타일러가 대통령직을 계승했다. 타일러는 미국 은행의 부활과 관세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클레이가 이끄는 당원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웹스터를 제외한 모든 각료가 타일러의 정책에 항의하는 뜻으로 사임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타일러와 제휴해 타일러-웹스터 정당을 만들겠다는 꿈은 실현되지 못했고, 1843년에는 결국 장관직을 사임했다. 1845년에 보스턴과 뉴욕의 기업인들은 웹스터를 상원에 다시 들어가도록 설득했다. 동시에 그들은 웹스터의 정치활동을 위한 모금을 했는데 이같은 일은 전에도 여러 번 있었다. 민주당 의원들은 그를 '업계의 유급(有給) 하수인'이라고 비난했다.

웹스터는 이번에는 타일러와 새로운 정치적 동맹을 맺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다. 그는 또한 메인 주 경계선 분쟁을 비롯해 영국과 논란이 되고 있는 여러 가지 현안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는 웹스터-애슈버턴 조약(1842)으로 경계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공했고, 국무부의 비밀자금으로 신문을 통한 조직적인 홍보활동을 벌여 이 조약에 대한 대중의 찬성을 얻어냈다.

1849년 멕시코와의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휘그당 소속 동료 의원들과 함께 제임스 K. 폴크 대통령이 나라를 전쟁에 끌어들였다고 비난하면서 전쟁의 종식을 요구했다(이 전쟁에서 그는 아들 하나를 잃었음). 그의 동료 의원들 가운데 일부는 윌멋 안건(멕시코에서 양도받은 지역에서는 노예제를 금지한다는 단서조항)을 지지했지만, 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멕시코에서 영토를 양도받는 것조차 반대했다(→ 멕시코 전쟁).

지역간 타협의 옹호

전쟁이 끝난 뒤 미국은 노예제도에 대한 찬반을 둘러싸고 지역분쟁이 한창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1850년 3월 7일 그는 멕시코에서 할양받은 영토에 노예제를 허용하자는 클레이의 타협안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서부는 지리적으로 볼 때 대농장(플랜테이션) 건설에 부적합하기 때문에 노예제를 금지할 필요가 없다는 그의 주장은 기업가들을 기쁘게 해주었지만, 노예제에 반대하는 휘그 당원들을 격분시켰다. 그는 1850~52년에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의 내각에서 국무장관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모든 영향력을 동원하여 북부로부터 커다란 반발을 받고 있던 1850년 타협안의 한 조항(자유주로 도망간 노예를 송환시키는 조항)을 강행하려고 했다.

그가 이렇게 행동한 것은 북부와 남부의 보수주의자들이 손을 잡고 그를 1852년에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통일당'을 결성할지도 모른다는 믿음에서였다. 따라서 대통령이 되고 싶은 야망이 또다시 좌절되었을 때 그는 괴로운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정치적 좌절을 겪을 때마다 그는 자기 소유의 농장으로 돌아가 농사짓는 일에서 위안을 찾았다. 이는 그의 재산상태를 계속 위태롭게 만든 값비싼 취미이기도 했다. 그는 여러 주에 농장을 갖고 있었지만, 그가 가장 좋아한 농장은 매사추세츠 주 해안의 마시필드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1852년에 죽었다.

웹스터에 대한 평가

그가 죽은 뒤 한 세대 동안 노예제 폐지론자와 그 동조자들은 웹스터가 1850년의 타협안을 지지한 것을 잊지 않고, 그를 성격적 결함 때문에 정치가로서의 파탄을 맞은 인물로 묘사하곤 했다.

1870년대에 출판된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 회고록에는 "다니엘 웹스터의 특출한 지능, 시샘많은 기질, 탐욕스러운 야망, 그리고 썩어빠진 마음"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반면에 그의 친구들은 그가 정치가로서의 탁월함만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인간적 매력도 지녔다고 회상하면서, 그를 '신 같은 다니엘'이라고 불렀다. 일부 작가들은 그의 애국적인 글이 남북전쟁 때 북부에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고 말했으며, 분명한 것은 에이브러햄 링컨도 그의 글을 그대로 인용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그가 죽고 두 세대가 흐른 뒤에는 국가주의자라는 명성이 타협주의자라는 악평을 압도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헤인의 주장에 대한 그의 2번째 답변을 암송했고,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그를 '위대한 3총사'(웹스터·컬훈·클레이)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생각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웹스터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거의 잊혀졌고 그에 대한 평가도 시들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보수주의 철학 때문에 시대적으로 부각된 인물로 기억되었다.

후세의 기업옹호자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정부가 기업을 원조함으로써 국민 전체의 복지를 증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웹스터의 권위에 호소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의 말을 거의 인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