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나톤

아크나톤

다른 표기 언어 Akhnaton 동의어 아멘호테프 4세, Amenhotep Ⅳ Neferkheperure Amenhotep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미상
국적 이집트

요약 BC 14세기 이집트에서 활동한 제18왕조의 왕(BC 1353~1336 재위).
(그). Amenophis. Akhenaton, Ikhnaton이라고도 쓰며, Amenhotep Ⅳ Neferkheperure Amenhotep라고도 함.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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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아크나톤 통치 이전의 이집트 종교와 문화
  3. 아크나톤의 통치 초기
  4. 아크타톤(아마르나)에서의 삶과 규율
  5. 새로운 종교
  6. 개혁운동의 쇠퇴와 몰락
  7. 평가
아크나톤(Akhnaton)
아크나톤(Akhnaton)

개요

아톤(Aton)을 새로이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의식을 확립했으며, 자신의 이름도 '아톤에게 이익되는 사람'이라는 뜻의 아크나톤으로 지었다(제18왕조).

아크나톤 통치 이전의 이집트 종교와 문화

고대 이집트의 종교는 신들이 훌륭한 질서를 가져다 주었으며 인간은 그 질서를 굳게 지켜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변화 없고 전통적인 것이었다.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종교는 그 변화마저도 신이 만들어낸 것처럼 그것을 체제 안으로 통합시키려고 애썼다. 아크나톤이 아멘호테프라고 불리는 4번째 파라오로 왕위에 올랐을 무렵, 제18왕조는 200년 가까이 이어져오고 있었고 1세기 동안 제국주의적인 정복과 외국에 대한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집트는 팔레스타인과 페니키아 그리고 누비아를 지배했다. 나라는 강력하고 부유했으며 군소 제후들은 중앙정부에 충성하고 있었다.

군사·정치 집단은 자신들의 입지를 유지하기 위하여 문화를 장악했다. 이집트는 신 또는 신들이 다스리는 신정국가(神政國家)라는 믿음이 전통적으로 있었기 때문에 이 집단은 성직자 계급과 맞물려 있었다. 또한 테베의 아몬 신(Amon of Thebes)이나 헬리오폴리스의 (Re of Heliopolis)같이 가장 부유하고 가장 힘센 신이 나라의 진로를 관장한다고 믿어지고 있었다.

왕은 자신의 주요활동들을 지시해주는 신탁을 신들에게 청해야 했다. 파라오는 부와 기품을 얻고 제국의 성공을 이끄는 주역을 맡는 대신에, 종교적(그리고 군사적) 권위를 다른 집단에게 넘겨주었다(신왕국).

아크나톤이 등장하기 전 1세기 동안, 정력적인 파라오 투트모스 3세는 이웃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땅을 정복했다.

그의 뒤를 이은 왕들은 활기찬 그의 생활방식을 이어갔으나 정복된 땅들이 굳게 지켜지게 되자 그러한 활력은 전쟁으로부터 스포츠로 돌려졌다. 아크나톤의 아버지 아멘호테프 3세는 젊었을 때 혈기왕성한 사냥꾼이었으나 그 아들은 신체적으로 약해 아버지처럼 외부 활동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그의 활동은 지적인 것이었다. 제국이 급작스레 팽창했기 때문에 이집트 문화가 자극을 받게 되었다. 건축물은 튼튼하게 기초를 마련하지도 않고 자꾸만 위로 높아졌다.

또 미술품에서는 아주 무겁고 각이 진 묘사 양식이 점차 부드럽고 둥근 모습으로 바뀌었다. 많은 이집트의 군인과 관리들이 외국에서 살았고 외국인들은 이집트로 유입되었다. 나일 강 유역에 사는 사람들과 외국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했던 두드러진 차이들이 희미해졌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집트 신들의 신전이 세워졌으며, 외국의 신들도 이집트에 소개되었다.

이집트의 남녀 신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도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아크나톤이 다스리기 전에 만들어진 신에 대한 찬가는 제국의 확대가 종교의 확대를 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들은 전세계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집트는 이미 신들을 통합했고 그래서 아몬 신과 태양신 레가 아몬-레 또는 아몬-레-하라크테 신으로 되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점차 신들을 통합된 존재로 생각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일신교의 서곡이 되었다(문화전파).

전통의 단절이 다른 곳에서도 나타났다.

그때까지 이집트 왕가의 혈통은 왕위 계승자가 자신의 가문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가능한 한 순수하게 유지되어왔다. 그러나 아멘호테프 3세는 티이(Tiy)라고 불리는 평민 출신의 여자와 결혼해 이러한 관습을 깨뜨렸다. 그녀는 남편에 대해 충실하면서도 궁정 안에서 특별한 권력을 휘둘렀음이 분명하다. 아크나톤은 이들이 결혼해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제국은 나라 밖의 요새들에 의해 굳건히 지켜졌으며 이들 요새는 이집트의 무역활동을 보장해주었다.

나일 강 유역 근처에는 풍부한 금광들이 있었고 이를 통해 이집트는 무역과 정치를 지배할 수 있었다. 소식을 전하는 배달꾼들은 진흙판에다 당시의 국제언어였던 바빌로니아의 설형문자를 새겨놓은 우편물을 가지고 이집트와 외국의 도시들을 오갔다. 이러한 통신은 이웃한 모든 나라들을 끝없이 다스려나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이집트 제국의 힘과 그 문화의 우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아크나톤의 통치 초기

학자들은 아멘호테프 3세가 몇 년 동안 아들과 공동통치하다가 아멘호테프 4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지 아니면 아들이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 통치권을 이어받았는지에 대해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젊은 파라오가 권력을 물려받기 전에 부왕이 죽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젊은 파라오는 가문의 이름인 아멘호테프를 아직 쓰고 있었고, 왕위에 오를 때도 전통적인 여러 신 특히 테베의 아몬 신과 태양신인 레-하라크테를 모시고 있었다. 그가 테베 근처에다 처음으로 지은 거대한 구식 건물들은 커다란 석벽돌로 되어 있었으며 레-하라크테 신 숭배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

미술품에서 나타나는 사람과 신의 윤곽은 1세기 전보다는 부드럽지만 여전히 전통적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가 파라오가 된 몇 년이 지나자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레-하라크테 신을 모시는 신전을 버리고 새로운 태양신 아톤(태양의 원반 형상을 지님)을 모실 곳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보다 2세대 앞선 사람들에게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신이었다.

아톤 신은 인간이나 동물의 모습으로 그려진 적이 없었으며 가끔 태양 원반에서 뻗어나오는 빛으로 상징화되어 사람들의 손길 위에 축복을 내리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아톤 신은 생명을 주고 생명을 이어나가게 하는 태양의 힘이었다. 그 신은 신전의 보이지 않는 거룩한 장소에 신상(神像)으로 모셔지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따뜻하게 비치는 탁 트인 곳에서 받들어 모셔졌다. 아톤 신을 위한 건물들은 새로운 종류의 것이었다. 옛 신전들의 무겁고 단단한 모습이 없어졌고 벽은 훨씬 크기가 작은 돌로 쌓아 올려졌으며 열정적인 새로운 기법으로 그려진 자그마한 장면들로 채워졌다.

예술적인 창의성이 부추김을 받게 되자 형태들은 지나치게 풍자적으로 되었다. 젊은 왕은 턱이 축 처졌고 목이 야위었으며 어깨가 비뚤어졌고 배가 불룩 나와 있었으며 허벅지가 두터웠기 때문에 이러한 특징들이 괴상한 모습으로 새겨졌다. 신하들도 왕과 마찬가지로 목이 야위고 배가 나온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왕의 아내 네페르티티는 몇몇 조각에서는 미인으로 나타나지만 새로운 예술기법을 따른 곳에서는 보기 흉한 마녀로 그려지기도 했다.

아크 나톤, 네페르티티와 자녀 모습
아크 나톤, 네페르티티와 자녀 모습

이집트의 미술은 변화 없는 영원을 그려내는 데에서 벗어나 매혹적이면서도 아울러 혐오감도 주는 생동적인 활기를 지니기 시작했다. 영원에서 현실과 현재로 내려와 왕이 특별한 의식을 주재하거나 아내에게 입맞춤을 하는 모습이나 식탁에 앉아 고기를 뜯는 모습 등이 그려졌다. 미술이 무한한 미래를 그려내 보여주는 한, 그것에는 확실한 시간이나 장소가 표현될 수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파라오 아래서 이집트 미술은 왕실과 그 주변 신하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해준다(태양숭배, 종교예술, 도상학, 이집트 미술).

아크타톤(아마르나)에서의 삶과 규율

새로운 신전들이 테베 부근의 카르나크에 세워졌는데 그 지역은 아몬 신이 지배하는 지역이며 여러 세대 동안 그 나라를 이끌어왔던 가문들이 다스리는 곳이었다.

새 왕은 이러한 전통적인 배경으로부터 완전히 담을 쌓아야 했다. 치세 6년째 그는 자기 이름을 아멘호테프(아몬 신이 만족하심)에서 아크나톤(아톤 신을 모시는 사람)으로 바꾸었고 그리하여 새 종교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도를 테베에서 북쪽으로 300㎞ 떨어져 있는 나일 강 동쪽 연안의 황량한 만(灣)으로 옮겼는데 이제 그곳은 텔엘아마르나 또는 아마르나라고 불리게 되었다.

여기에다 그는 아케타톤(아톤 신의 효력이 미치는 곳)이라고 이름 붙인 새로운 도시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이 곳의 경계를 결코 넘어가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는데 그 뜻은 그가 그곳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도시의 한계를 돌로 표시된 경계 너머로 밀고 나가지 않겠다는 뜻인 것 같다. 그는 이제 테베에 있는 적대적인 세력들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아크나톤과 네페르티티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 딸들은 새로운 '진리'에 몰두했다. 그들 가족의 삶은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그들은 태양빛이 비치는 신전에서 아톤을 받들어 모셨다(신성한 왕권). 새로이 만들어진 귀족들과 관리들은 아크나톤과 네페르티티에게 헌신했다.

이집트의 문헌에서는 왕이 신이고 따라서 그 땅에 주어지는 모든 혜택의 근원이라는 점이 언제나 명시되었다.

그러나 방대하고 복잡한 제국은 관료들이 이끌어가고 이들이 왕을 대신해 권한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아크나톤의 선왕들은 사실상 갇혀 있는 처지에 있었다. 그래서 국왕이 지녔던 옛 권위를 되찾으려 한 그의 정치개혁은 반동적인 것이었다. 그가 도입한 특별히 새로운 요소들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그의 통치권 규약은 아주 오래된 '진리'를 되살린다는 것이었다는 사실이 가려질 수도 있다.

새로운 도시 아마르나는 매력적이었음이 틀림없다.

관리들은 공간이 넓고 나무와 수영장과 정원이 딸린 별장에서 살았다. 집안의 벽면들은 멋들어지게 흐르는 듯한 새로운 기법으로 색칠되어 있었고 바닥 부근은 마치 풀밭과도 같이 보이며 천장에는 온갖 꽃들이 그려져 있었다. 아마르나 미술은 네페르티티의 유명한 흉상과 같이 매우 품위 있는 것부터 괴상한 것까지 다양하며 모든 것이 생생하게 표현되었다. 아마도 네페르티티 초상의 우아하며 연약한 모습은 전통주의자들을 불쾌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계속될 듯한 견고함을 보여주기보다는 미묘하고도 덧없는 인상을 주었다.

새로운 '진리'는 땅으로 내려와 있었다. 총리가 왕의 마차 앞에서 뛰어가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그것은 변화없던 옛날에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던 시도였다. 바쁜 모습의 시장과 군인들의 위병소가 사람들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입모양과 더불어 그려져 있다. 이러한 고대 미술을 바라보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그곳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새로운 종교

아톤 신을 받드는 종교는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는다.

아크나톤과 네페르티티는 오로지 이 태양신만을 받들어 모셨다. 그들에게는 아톤 신이 '유일한 신'이었다. 아크나톤은 자신의 옛 이름인 아멘호테프를 버렸고 '아몬'이라는 이름도 이집트 전역의 비문들에서 지웠다. 여기저기에서 그밖의 남녀 신들의 이름이 지워졌고 몇몇 문헌에서는 '모든 신들'이라는 말이 사라졌다. 장례의식에서 오시리스 신은 사라졌고 대신 아크나톤이 죽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근원이 되었다. 석관(石棺)의 귀퉁이에는 수호여신들의 형상 대신에 네페르티티의 형상이 자리잡았다.

태양 신을 숭배하는 아크나톤과 그의 가족을 표현한 그림
태양 신을 숭배하는 아크나톤과 그의 가족을 표현한 그림

하지만 아크나톤과 네페르티티는 오로지 아톤 신에게만 참배를 드렸다. 그것은 그때까지 있었던 어떤 종교보다도 일신교에 가까운 것이었다(장례의식).

왕은 자기의 신에게 삶의 여러 가지 혜택에 감사드리는 아름다운 찬송가를 지어 바쳤다. 찬송가에 이르기를 아톤 신은 이러한 축복들을 이집트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시리아와 누비아',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나라들', '모든 사람과 가축 그리고 야생 짐승들', '굴에서 사는 사자와 강물에 사는 물고기', 그리고 '알 속에 있는 병아리'에게도 주셨다는 것이다.

태양이 떠올랐을 때 사람은 살아 움직이지만 밤에는 어두운 땅이 죽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찬송은 성서의 〈시편〉 제104편과 아주 비슷하다고 종종 지적되어왔다. 2가지 모두 하느님 또는 신은 자신이 내려주신 것들로 말미암아 찬양받고 있다는 공통된 생각을 반영한다(아톤 찬송집).

아톤을 받드는 종교는 어떠한 도덕률도 지니지 않은 기쁜 마음으로 자연을 숭배하는 종교였다(자연숭배). 사람은 삶과 따뜻함을 내리신 태양에 감사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것은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벌을 내릴지도 모르는 예전의 위대한 이집트 신들이 지녔던 무시무시할 정도로 엄격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헤브라이 신이 자기 민족에게 씌우려 한 무거운 요구도 물론 아니었다. 아톤 신을 받드는 종교에서는 '너는……해야 한다'와 '너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심미적·지적인 종교로서, 아마도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아톤 신을 즐겁게 받들어 모셨다는 증거는 전혀 없지만 무덤에서는 그들이 아톤 신뿐 아니라 아크나톤과 네페르티티에게도 기도 드리는 모습이 발견된다. 사람들은 눈에 뚜렷이 나타나는 힘을 보고 싶어했다. 아크나톤은 이집트를 늘 다스려왔던 신이자 왕(god-king)인 존재였고 네페르티티는 이전의 모든 어머니 신들을 대신할 수 있었다. 왕과 왕비는 이러한 숭배를 그들의 정당한 권리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개혁운동의 쇠퇴와 몰락

그 당시의 정치는 어려움이 많았음에 틀림없다.

지배계급은 힘을 빼앗겼지만 여전히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문헌에서 보면 아크나톤은 군대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이때문에 군대는 항상 소요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강력한 육군과 해군이 없었기 때문에 대외무역은 줄어들기 시작했으며 내국세가 지방 관리들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고 마침내는 불만에 찬 사제와 관리들이 군대와 손을 잡고 새로운 운동에 반기를 들었다. 아크나톤은 이러한 세력들과 맞설 수 있었으나 그를 계승한 나약한 왕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텔엘아마르나의 유적 가운데에는 아시아의 군주들이 아멘호테프 3세와 아크나톤의 궁정으로 보냈던 국제 통신문을 모아놓은 문헌 보관소가 있는데 거기서 발견된 '아마르나 서한'은 당시의 새로운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당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 있던 군사령관들과 지방행정관들은 무시당하고 있었다. 이집트와의 무역에서 이득을 보았던 지방 제후들은 자신들의 지원 요청에 이집트가 아무런 답도 보내지 않자 실망했다.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 있는 야심만만한 제후들을 비롯해 동부 사막에서 온 침략자와 북쪽으로는 대담한 히타이트인 등 적대적인 세력들이 들고 일어났다. 히타이트의 수도에서 발견된 기록과 아마르나 서한은 아시아에서 이집트 제국이 무너져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방의 제후들은 거주하던 도시에서 도망쳐나갈 수밖에 없었다.

히타이트의 도움을 받은 침략자들은 이집트 군대에게서 땅을 빼앗았다. 이집트는 팔레스타인의 남서부 귀퉁이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해외영토를 상실한 것 같다. 이상에 대한 집착 때문에 아크나톤은 자랑스러운 이집트 제국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아크나톤은 이러한 재난에 부딪히자 풀이 약간 꺾였을 것이다. 치세 12년째에는 현실적이고 몸집이 작은 대비(大妃) 티이가 아마르나를 방문했다. 그가 그뒤 자기의 극단적인 생각들을 고쳤다는 증거가 약간 남아 있다. 아크나톤이 네페르티티를 멀리하고 자기 사위 스멘크카레를 총신으로 가까이했다는 이야기 등은 사실 여부가 분명하지 않다.

스멘크카레가 테베로 되돌아갔기 때문에 왕과 네페르티티 사이에는 화해가 이루어졌던 것 같다.

아크나톤이 죽은 뒤 잠시 동안은 스멘크카레가, 그리고 그 다음에는 둘째 사위 투탕카톤이 그의 뒤를 이었다. 투탕카톤은 아톤 신을 버리고 아몬 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에서 자기 이름을 투탕카멘으로 바꾸었으며 아마르나에서 테베로 수도를 옮겼다.

또한 그는 옛 신들에게 새로운 재물과 특권을 바쳐 속죄했다. 1922년에 투탕카멘의 무덤이 테베 서부에서 발견되었을 때 그 무덤은 마침내 아마르나 미술의 호화로운 위업을 드러냈다. 이 젊은 왕이 죽고 몇 년이 지나자 군대가 호렘헤브 장군을 앞세워 왕위를 차지했다. 호렘헤브는 옛 체제를 완전히 되살리기 위해 반동 개혁 조치를 실시했다.

평가

아크나톤은 정신적·육체적으로 이상한 인물이었다.

그의 남자답지 못한 특이한 체구에 대해 병리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현대의 몇몇 학자는 그가 자식을 가질 능력이 있었는지를 의문시하고 있으나, 6명의 딸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추측은 분명 사실이 아니다. 문헌에는 서로 모순되는 말들이 실려 있지만 그의 미라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고대에서나 현대에서나 그는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지만,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는 것은 그가 고대 역사의 주요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당시의 강력하고 변화무쌍한 세력들 앞에서 결단력 있는 성격을 키웠으나 굳건한 생각과 이상 때문에 자신의 시대로부터 동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