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

실용주의

다른 표기 언어 pragmatism , 實用主義

요약 넓은 의미로는 유용성·효율성·실제성을 가리키며 학문적 의미로는 추상적·궁극적 원리의 권위에 반대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실용주의는 미국의 철학사조로서 법·교육·정치·사회 이론, 나아가 예술·종교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넓은 의미로는 어떤 생각이나 정책이 유용성·효율성·실제성을 띠고 있음을 가리키며, 학문적 의미로는 추상적·궁극적 원리의 권위에 반대하는 태도를 지칭한다. 실용주의라는 말은 '행동'·'사건'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 πραγμα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특정 철학이론을 지칭하기 위해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찰스 샌더스 퍼스는 칸트가 실험적·경험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쓴 독일어 용법'pragmatisch'를 더 염두에 두었다.

실용주의는 미국의 철학사조로서 법·교육·정치·사회 이론, 나아가 예술·종교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철학의 기본 논점은 다음 6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실재의 가변적 성질을 강조하고 인간 지식을 이러한 실재에 적용하고 그것을 통제하는 도구로 본다. 둘째, 비판적 경험론을 계승하여 연구활동에서 고정된 원칙이나 선천적 추론보다는 현실경험을 더 중시한다(선험적 지식). 셋째, 어떤 생각이나 명제가 지닌 실용적 의미는 그 생각을 현실에 적용할 때 생겨나는 실제 결과 속에 들어 있다. 넷째, 진리는 검증과정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관념이나 생각이 성공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곧 그것의 진리를 입증한다. 다섯째, 관념은 외부 대상의 반영이나 모사가 아니라 행위의 도구로 보아야 한다. 즉 관념은 행동에서 생겨날 결과에 대한 가설이자 예측이며 세계 속에서 행위를 조직·규제하는 방편이다. 여섯째, 방법론의 측면에서 볼 때 실재에 관한 인간의 사고는 인간 자신의 이해관계와 필요에 의해 생겨나며 효율성·효용성 여부에 의해 정당화된다.

역사

선구적 근세철학자들

실용주의는 지나치게 현학적·폐쇄적 체계를 유지하고 있던 19세기 관념론 철학에 대한 반발이 확산되는 가운데 생겨났다.

게다가 당시 태동한 진화론은 실용주의자가 볼 때 자연·생명·이성에 대해 비(非)관념론적인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결과 삶의 목적과 우주 일반에 관한 거창한 관념론적·합리론적 설명보다는 인간 삶에 유용한 변화를 가져올 기술의 성장·개발이 더 중요했다.

실용주의의 초기 형성단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철학사조는 2가지이다.

하나는 존 스튜어트 밀, 알렉산더 베인, 존 벤 등 지식 형성에서 경험의 역할을 강조한 영국 경험론 전통이다. 다른 하나는 근세 독일철학의 모든 요소로서, 예컨대 믿음의 합목적성과 믿음 형성에서 의지·욕구의 개입을 강조한 칸트, 모든 이성을 인간경험의 확장과 심화를 위한 '실천적' 계기로 파악한 낭만주의적 관념론, 변화와 발전을 중시하는 헤겔의 역사·사회 사상 등이다.

이 2가지 지적 배경 이외에 19세기의 급속한 산업·무역의 발전, 고된 노동은 반드시 보상을 가져다준다는 청교도적 낙관주의 등 당시 미국의 사회 분위기도 실용주의가 출현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형이상학 클럽

실용주의가 처음 등장한 무대는 1870년대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에 있던 '형이상학 클럽' 토론회였다.

이 클럽에는 퍼스, 제임스 외에 C. 라이트, F. E. 에벗, O. W. 홈스 2세 등이 회원으로 속해 있었다. 이제는 고전적 문헌이 된 퍼스의 〈신념의 확정 The Fixation of Belief〉(1877. 11)도 이 클럽에서 발표한 것으로 보이며, 제임스는 1878년 〈마음을 대응으로 보는 스펜서의 정의 Spencer's Definition of Mind as Correspondence〉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제임스가 강의에서 실용주의를 정식 소개하면서 퍼스를 선구자로 지목한 것은 20년 뒤의 일이다.

고전적 실용주의자들

퍼스의 실용주의 철학은 사고·기호에 관한 그의 일반이론의 한 부분이다.

그에 따르면 사고 혹은 '탐구'가 시작되는 것은 습관화한 행위에 장애가 나타나 의심과 혼란이 생길 때이다. 반면 새로운 신념이 확립되면 결단이 이루어지고 다시 안정상태가 회복된다. 퍼스는 의심과 탐구에 대한 이러한 분석을 더욱 포괄적 기호이론으로 확장하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그의 실용주의는 언어적·개념적 혼란을 제거하기 위해 특정 기호를 더욱 분명한 의미를 가진 다른 기호로 번역하는 방법론·의미론의 형태를 띠고 있다.

논쟁의 결과가 아무런 해결안도 내놓지 못할 경우 문제는 처음부터 언어의 오용, 개념적 혼란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관념을 명료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 관념이 지시하는 대상이 일으키는 행동 결과를 고려해야 한다. 퍼스는 "어떤 대상이 실제로 무슨 결과를 낳는가를 생각하라.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결과의 집합이 그 대상에 관한 관념의 전부이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진리이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신념이 참이라는 것은 '종국적으로' 그 신념에 대한 동의(同意)가 늘고 이의(異意)가 주는 것을 의미한다.

실용주의 이론의 또다른 형태는 윌리엄 제임스가 내놓았다.

퍼스와 제임스의 기본 차이점은 각자의 실용주의적 분석이 지향하는 목적이 다르다는 데 있다. 퍼스가 주로 의미 일반을 설명하려고 한 데 반해 제임스는 관념·신념이 인간 경험에서 어떤 몫을 하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또 퍼스는 스콜라 철학풍의 실재론자인 데 반해 제임스는 유명론자로서 보편자의 독자적 실재성을 부정했다. 제임스는 주로 가치·만족 등과 같은 정신의 목적지향적 활동의 여러 귀결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사고는 환경에 대한 적응성과 목적성을 갖기 마련이지만 여기에는 정서적·실천적 이해관계가 필연적으로 뒤섞이게 된다.

따라서 진리와 의미는 가치의 일종인 셈이다. 그에게 "진리란 신념이 활동하는 과정에서 좋다고 판명된 모든 것을 일컫는다." 의학과 심리학을 전공하고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제임스는 인간사고의 주요기능은 어디까지나 "환경세계와의 만족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다고 확신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실재를 변형하는 존재이며 따라서 만일 그 목적에 종교적·형이상학적 신념도 도움을 준다면 얼마든지 그것을 믿을 권리가 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그의 논문 〈믿으려는 의지 The Will to Believe〉의 주요논점이다. 그의 기능적 진리관에 따르면 관념의 원활한 작용 여부가 진리를 결정한다.

이러한 제임스의 실용주의 이론은 당시 헤겔 관념론에서 빠져나오려고 노력하던 존 듀이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듀이는 실용주의 이론 내부의 여러 이론적 모순을 교정하고 다듬고 새롭게 정식화하려고 힘썼다. 그결과 그의 도구주의가 성립했다.

그에 따르면 과학적·도덕적·사회적 경험은 각기 주제가 다르긴 하지만 "미래의 결과에 대한 실험적 결정"이라는 점에서 사고 방법은 모두 같다. 지성적 행위는 의심과 문제에 봉착함으로써 활동하기 시작해 일련의 과정을 거친 뒤 해결책과 "믿을 만한 판단"에 도달하게 된다. 인간 행위의 생물적·문화적·형식적 조건에 대한 듀이의 분석에 따르면 모든 반성적 행위는 미래의 행동·결과와 결부된 상황을 평가한다. 그러므로 탐구는 본질적으로 평가절차이다.

특히 도덕적 행동의 경우 주어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필요한 일은 단순히 도덕규범을 적용하기보다는 "여러 가지 욕구와 명목상의 선(善)이 상충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탐구해야 한다". 도덕적 이상은 경험을 통제하고 미래의 선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나 가설일 뿐이다.

그밖의 미국 실용주의자들

미국 실용주의에 기여한 그밖의 주요인물로는 G. H. 미드와 C. I. 루이스가 있다.

사회심리학을 주로 연구한 미드는 가장 포괄적인 실용주의 심리학을 수립했다. 그는 인간정신·자의식이 사회적 상호작용, 몸짓의 사용, '의미있는 기호'의 사용 등에서 진화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개념론적 실용주의' 이론을 내세운 루이스는 주로 경험을 해석하는 범주·원리 등에 관심을 쏟았다. 그에 따르면 비록 감각 소여(所與)는 불변적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가는 정신의 목적에 달려 있으며 이러한 정신의 목적은 '언제나 참인' 인식의 선천적 요소이다.

유럽의 실용주의

제임스는 실용주의가 단순히 미국 내에 국한된 철학사조가 아니라, 모리스 블롱델, 에두아르 르 로이, B. 드 살리 등 프랑스 철학자나, 조반니 파피니 등 이탈리아 철학자도 같은 범주에 넣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 프랑스의 사상가 조르주 소렐도 제임스의 실용주의를 사회비판에 적용했다. 한때 무솔리니가 자신의 철학적 스승이 소렐과 제임스라고 밝히면서 "행동에 대한 믿음, 삶과 투쟁의 의지는 파시즘이 성공하게 된 원동력"이라고 말했지만 민주주의자 제임스를 이처럼 곡해한 경우도 드물 것이다.

현대의 추세

현대 미국 철학에서는 실용주의를 발전적으로 변형·적용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다.

예컨대 시드니 은 각종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에서 퍼스와 듀이의 과학적 실용주의에 입각하여 실험적 탐구논리와 민주주의 윤리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였다. W. V. 콰인과 같은 탁월한 논리학자는 "더욱 철저한 실용주의"를 주장하면서 어떠한 과학적 개념도 경험의 흐름 속에서 수정·변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콰인과 유사한 관점에 서 있는 넬슨 굿먼도 유일무이한 실재의 본성을 추구하는 존재론은 그 존재론적 물음을 담아내는 특수한 언어의 성격 때문에 항상 잘못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대상에 관한 서술방식은 궁극적으로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고 그 결정은 실용적일 수밖에 없다.

실용주의에 대한 평가

실용주의는 흔히 미국 기업정신의 합리화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진리를 유용성과 똑같이 보는 실용주의 진리관은 더욱 비판받았으며 심지어 제임스는 진리를 주관적 관념의 유희와 동일시했다는 비난에 곧잘 부딪혔다. 그러나 대개 그러한 비난과 비판은 이 철학자들의 저작을 면밀하게 읽고 한 경우가 드물다.

가령 제임스는 "한 개인이 직접 좋다고 느끼는 것이 참된 것은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실용주의는 이제 하나의 단일 철학사조로는 더이상 남아 있지 않지만 미래의 학문 탐구와 발전에 여러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이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사고의 의미를 목적지향적 활동형태로 해석한 점, 지식을 규범적·기술적 요소가 한데 통합되어 있는 평가 절차로 본 점, 과학적 탐구논리를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지성적 행위의 한 규범으로 본 점 등이다.

특히 영원한 진리체계만을 추구한 19세기 철학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면서 인간 이성의 상대성·우연성·오류가능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고 한 점은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