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샌더스 퍼스

찰스 샌더스 퍼스

다른 표기 언어 퍼스 , Charles Sanders Peirce
요약 테이블
출생 1839. 9. 10, 미국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
사망 1914. 4. 19, 펜실베이니아 밀퍼드 근처
국적 미국

요약 퍼스는 관계논리에 대한 연구와 실용주의를 탐구방법으로 내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초기에 측량학회에서 한 천문학 분야의 일들은 거의 하버드대학교 천문대에서 이루어졌다. 1878년 이 관측소 연보에 퍼스의 글 <광도 측정 연구>가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은하계의 모양을 더욱 정확하게 측정하는 법에 관한 것이었다. 진자에 관한 연구에서 길이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 m 길이를 빛의 파장으로 측정하는 선구적 방법을 개발했다(1877~79). 중력측정에 관한 이론적이며 실험적 연구를 통해 퍼스와 미국연안측지학측량학회는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스미스소니언, 앤 아버, 매디슨, 코넬 등지의 중력에 관한 보고서>(1889)는 논문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에 발표되지 못했다. 결국 그는 1891년말 학회를 나왔으며, 1914년 죽을 때까지 일정한 직업과 수입이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화학자문기사, 수학자, 발명가 등으로도 일했다.

목차

접기
  1. 퍼스의 논리학 연구
  2. 퍼스의 철학적 업적
  3. 퍼스에 대한 평가

관계논리에 대한 연구와 실용주의를 탐구방법으로 내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벤저민 퍼스와 사라 밀즈 사이에서 태어난 4명의 아들 중 하나였다. 아버지는 하버드대학교에서 천문학과 수학을 가르친 퍼킨스 좌 교수였다. 1859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연안측지학측량학회의 현장파견대에서 1년간 근무했다. 그후 하버드대학교의 로렌스 과학학교에 입학하여, 1863년 화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 사이 1861년 측량학회에 재가입해 아버지의 계산조수로 일하기도 했는데, 당시 아버지는 달이 플레이아데스 성단을 가리는 것을 관찰하여 유럽 관측점을 기준으로 미국 관측점의 경도를 정하는 일을 맡았다. 퍼스가 초기에 측량학회에서 한 천문학 분야의 일들은 거의 하버드대학교 천문대에서 이루어졌다. 1878년 이 관측소 연보에 퍼스의 글 〈광도 측정 연구 Photometric Researches〉가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은하계의 모양을 더욱 정확하게 측정하는 법에 관한 것이었다.

1871년 아버지는 정부지원금을 얻어 대서양 연안과 태평양 연안의 측량소를 측지학적으로 연결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와 같이 대륙을 가로지르는 삼각측정을 하는 데는 지구의 타원율을 더욱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한 북아메리카의 중력측정소가 절실히 필요했다. 퍼스는 바로 이 계획을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계획을 추진하면서 중력을 측정하는 수단으로 진자의 진동에 관한 이론과 실습에 기여했다. 또 진자에 관한 연구에서 길이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 m 길이를 빛의 파장으로 측정하는 선구적 방법을 개발했다(1877~79)(→ 미터).

퍼스는 1873~86년 유럽과 미국의 20여 곳에서 진자의 진동을 직접 실험했고, 캐나다 극지의 그린넬랜드를 포함한 여러 장소에서는 대리 실험을 했다. 중력측정에 관한 이론적·실험적 연구를 통해 퍼스와 미국연안측지학측량학회는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1885년 이래 퍼스는 학회의 관리자들과 자주 의견대립이 있었고, 그가 보고서를 준비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면 게으른 탓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그의 〈스미스소니언, 앤 아버, 매디슨, 코넬 등지의 중력에 관한 보고서 Report on Gravity at the Smithsonian, Ann Arbor, Madison, Cornell〉(1889)는 논문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에 발표되지 못했다. 결국 퍼스는 1891년말 학회를 나왔으며, 1914년 죽을 때까지 일정한 직업과 수입이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화학자문기사·수학자·발명가 등으로도 일했다.

퍼스는 1876년 미국학술원 회원, 1877년 국립과학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878~1911년 국립과학원에 38편의 논문을 제출했는데 그 가운데 1/3이 논리학에 관한 글이었고 나머지는 수학·물리학·측지학·분광학·실험심리학에 관한 글이었다. 1880년에는 런던수학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Charles Sanders Peirce
Charles Sanders Peirce

퍼스의 논리학 연구

퍼스의 학문 경력은 물리학에서 형성되었지만 야망은 논리학 분야에 있었다. 퍼스는 31세가 되기까지 이미 화학·문헌학·역사철학·종교철학·철학사에 관한 논문과 비평 외에 논리학 분야에서도 많은 학술 논문을 발표했다. 또 하버드대학교에서 2차례, 로웰인스티튜트에서 1차례 강의를 했는데 모두 논리학에 관한 것이었다.

퍼스는 논리학을 연구하는 교수직을 원했지만 자리가 없었으며 그를 위해 그 교수직을 신설하지도 않았다. 아직 논리학의 시대는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야망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 것은 1879~84년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강의할 때였다. 그때 퍼스는 측량학회의 일을 보면서 이 대학교의 논리학 강의를 맡고 있었다.

퍼스는 가장 넓은 의미로 논리학을 기호에 관한 일반이론인 기호학과 동일시했다. 그는 2종류의 작용, 즉 기호작용 또는 기호화와 동역적 작용 또는 기계적 작용을 구분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는 〈기호학으로서 논리체계 A System of Logic, Considered as Semiotic〉라는 제목의 주저를 통해 이 문제를 다루려 했으나 이 책은 완성되지 못했다.

퍼스는 연역논리 또는 수리논리에 크게 기여했지만 무엇보다도 '과학 논리', 즉 귀납논리와 자신이 '역귀납'(retroduction) 또는 '귀추법'(abduction)이라고 부른 논리를 연구했다. 이 논리는 예기치 못한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시험삼아 승인하는 방법이다. 그의 일생에 걸친 야망은 논리학에서 연역법과 더불어 귀추법과 귀납법을 굳건하고 영구적으로 확립하는 일이었다. 이 3가지 논리는 서로 구별되면서도 적극적으로 연관된다고 보았다. 퍼스는 논리학을 위해 매우 다양한 과학적 연구를 시도했는데, 그 이유는 논리학자란 모든 과학의 방법과 추리에 정통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퍼스의 철학적 업적

퍼스의 실용주의는 1877~78년 〈월간 대중과학 Popular Science Monthly〉지에 〈과학 논리의 예증들 Illustrations of Logic of Science〉을 연재하면서 처음 다듬어졌다.

퍼스는 과학 방법이 믿음을 확정하는 여러 방법들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했다. 믿음은 본질적으로 습관적 행위이다. 과학 방법의 특징은 우선 관념을 대상의 감각적 효과에 의해, 2번째는 그런 효과에 적합한 습관적 행위에 의해 명료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광물학자가 단단함의 관념을 명료하게 하는 방법을 살펴보자.

xy보다 더 단단함을 감각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xy를 긁지만 yx를 긁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xy보다 더 단단함을 믿는 것은 y를 긁기 위해 습관적으로 x를 사용하거나, y가 긁히지 않도록 yx에게서 떼어놓는다는 것을 뜻한다.

퍼스는 같은 방법으로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하며 중요한 '확률' 관념도 마찬가지로 명료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1903년 하버드대학교 강의에서 그는 실용주의를 더욱 좁은 의미로 '귀추논리'와 동일시했다. 또 1891~93년에 그가 전개한 '진화론적 형이상학'도 상위 특수과학이 하위 가설들을 만드는 데 안내 역할을 하는 작업가설이었다. 따라서 우연과 연속성을 강조하는 그의 형이상학 저술들은 과학 논리를 밀고 나간 사례에 지나지 않았다. 1900년대초 실용주의 운동이 성행할 때 퍼스는 당시 유행한 실용주의의 온갖 형태뿐만 아니라 실용주의에 대한 자신의 설명방식에 대해서도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생애 마지막 연구기간에 주로 그때까지 '실용주의'라고 부른 사상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수정하고 체계적으로 완성·증명하는 데 몰두했다.

퍼스는 자신이 '철학에 한 가지 이바지한 것'은 '새로운 범주 목록'을 만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제시한 새로운 범주는 칸트의 '오성의 선험적 형식'과 비슷하지만 칸트의 12범주를 질·관계·표상 등 세 범주로 축소한 것이었다. 퍼스는 이후의 저작에서 이 범주들을 다시 질·반작용·매개 등으로 부르기도 했으며, 마지막에는 1차성·2차성·3차성 등으로 불렀다. 또 처음에는 범주를 개념이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1가·2가·3가 요소 등 환원불가능한 개념 요소들이라고도 했다. 예를 들어 이 요소들은 양상을 가능성·현실성·필연성으로 나눌 때, 기호를 도상·지표·상징으로 나눌 때, 그리고 상징을 다시 명사·명제·논증으로 나눌 때, 또 논증을 다시 귀추·귀납·연역으로 나눌 때 차례로 나타난다. 새로운 범주 목록의 주된 기능은 이 마지막 구분을 체계적으로 뒷받침하는 데 있었다.

퍼스는 2번 결혼했다. 첫번째는 1862년 해리엇 멜루시나 페이와의 결혼이었고, 1876년 그녀가 떠나자 1883년 다시 줄리엣 푸르탈라이와 결혼했다. 2번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퍼스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죽을 때까지 26년간 퍼스와 줄리엣은 펜실베이니아 주 밀퍼드 근처 델라웨어 강가의 농장에서 살았다. 그는 스스로 목가적인 논리학자 또는 논리학을 위한 은둔자라고 불렀다. 말년을 심한 질병과 혹독한 가난 속에서 보냈으며, 윌리엄 제임스와 같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연명해나갔다.

퍼스에 대한 평가

오늘날 퍼스는 미국이 지금까지 배출한 가장 독창적이고 다재다능한 지성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정은 매우 느리게 이루어졌으며, 대부분의 저작은 아직도 전문가들에게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또 전문가들 역시 그의 저작 전체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부분들과의 연관을 고려하지 않고 그 일부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의 실용주의조차도 자신의 작업보다는 다른 실용주의자들의 작업과 관련하여 고찰되고 있는 실정이다. 철학자는 그를 우연과 연속성에 관한 진화론적 형이상학(기본적 실재에 관한 이론)을 제시한 사람으로 알 것이고, 수학자는 선형대수에 이바지한 사람으로 알 것이다.

논리학자는 관계논리·양화논리·3가논리 등을 포함하는 논리대수의 창시자로 기억할 것이다. 심리학자라면 미국 최초의 현대심리학자로 알 것이고, 기호학자는 기호학의 공동창시자로 알 것이며, 문헌학자는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의 영어 발음에 관한 권위자로 알지도 모른다. 또 컴퓨터 과학자는 그의 편지들에서 전자 전환회로 컴퓨터의 설계와 이론에 관한 최초의 스케치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를 포함한 많은 업적들은 그의 전문활동을 벗어나 이루어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