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스탠리

다른 표기 언어 Sir Henry Morton Stanley 동의어 John Rowlands, Bula Matari, 헨리 모턴 스탠리
요약 테이블
출생 1841. 1. 28, 웨일스 덴비셔 덴비
사망 1904. 5. 10, 런던
국적 미국

요약 중앙 아프리카를 탐험한 영국계 미국인 탐험가.
본명은 John Rowlands. 별칭은 Bula Matari(콩고어로 '바위를 부수는 사람'이라는 뜻).

목차

접기
  1. 초기생애
  2. 리빙스턴 구조
  3. 콩고 발견
  4. 에민 파샤 구조
  5. 스탠리에 대한 평가
헨리 모턴 스탠리(Sir Henry Morton Stanley)
헨리 모턴 스탠리(Sir Henry Morton Stanley)

스코틀랜드 선교단과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구조한 일, 콩고 지역을 발견·개발한 일로 유명하다. 1899년에 기사작위를 받았다.

초기생애

스탠리는 존 롤랜즈와 엘리자베스 페리 사이에 사생아로 태어나 존 롤랜즈로 입적되었다. 어머니로부터 할아버지 모제스 페리에게 맡겨진 그는 얼마간은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친지들의 보호하에서 자라고, 또 얼마간은 성에이서프 구빈원에서 엄격한 구빈원장의 학대를 받으며 생활했다. 구빈원의 합리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그는 강한 종교적 신앙을 갖게 되었고 질서와 청결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지만, 원생 시절에 받은 굴욕감은 어머니의 계속된 무관심과 마찬가지로 그의 성격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15세 때 그는 구빈원에서 도망쳐나왔다. 그후 외가 친척들에게 의지해 생활하는 불행한 나날들이 이어지다가 선실 급사 일을 하며 리버풀을 출항해, 1859년 뉴올리언스에 내렸을 때 비로소 그의 불행은 끝이 났다. 그곳에서 롤랜즈는 마음씨 좋은 상인 헨리 모튼 스탠리를 만났다. 스탠리는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여주고 돌보아주면서 앞으로 그를 부양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 상인이 얼마 지나지 않아 외국에서 사망하자 그는 또다시 세상에 홀로 남겨지고 말았지만, 스탠리가 베푼 친절은 소년의 인생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그이후로 어린 스탠리는 적어도 한 인간만은 자신을 사랑하고 믿어주었음을 가슴 깊이 간직했으며, 이후 풍족했던 중년시절에 그 역시 아들 하나를 입양했다.

수년 동안 스탠리는 유랑생활을 했다. 미국 남북전쟁 때에는 군인으로, 상선과 미해군의 선원으로, 서부 개척시대 초기에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으며, 〈미국과 아시아에서의 나의 초기 여행과 모험 My Early Travels and Adventures in America and Asia〉(1895)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터키까지 여행하기도 했다. 그는 웨일스에 있는 어머니를 2차례 방문했으나, 그가 태어난 이후로 줄곧 그랬듯이 그녀의 변함없는 무관심만 느꼈을 뿐이었다.

1867년 스탠리는 〈뉴욕 헤럴드 The New York Herald〉의 제임스 고든 베넷에게 에티오피아의 테오드로스 2세에 대항하기 위해 파견되는 영국 원정군의 특파원으로 일하겠다고 제의하고, 맨처음으로 1868년 마그달라의 함락 소식을 보도했다. 1869년 마드리드에서 〈뉴욕 헤럴드〉에 실을 스페인 내란기사를 취재하고 있을 당시, 제임스 고든 베넷 2세가 그를 파리로 소환해 '리빙스턴을 찾아내라'는 임무를 맡겼다.

리빙스턴 구조

1866년 리빙스턴이 중앙 아프리카의 호수들을 탐사하고 나일 강의 발원지를 확인할 목적으로 아프리카의 오지로 들어간 뒤 그에 대한 소식은 거의 없었으나, 탕가니카 호 가까이에 있는 우지지 부근에 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베넷은 스탠리에게 수에즈 운하의 개통에 관한 취재를 위해 이집트·시리아·팔레스타인을 거쳐서 아프리카로 가도록 지시해 스탠리는 1871년 1월 6일이 되어서야 잔지바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특종'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잔지바르 당국은 물론 리빙스턴의 물자보급 책임을 맡고 있었던 영국 영사 존 커크 경에게까지 비밀을 지켰다. 3월 21일 완벽한 장비를 갖춘 대열을 이끌고 아프리카 오지를 향해 출발한 그는 전쟁으로 혼란스럽고 병고에 찌든 지역을 통과하면서 강행군을 계속해 마침내 11월 우지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식량과 약품이 모두 떨어진 채 앓고 있는 리빙스턴을 발견했다.

스탠리가 "리빙스턴 박사님이시지요?"라고한 인사말은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그들은 함께 탕가니카 호를 탐사해 루시지 강이 호수의 북쪽 끝으로 흘러나가는 것이 아니라 탕가니카 호로 흘러든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빅토리아 호가 나일 강의 주요발원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몇몇 지리학자들의 제안처럼 탕가니카 호는 나일 강의 발원지가 아님을 입증했다. 나일 강을 찾아 콩고 지역의 서쪽으로 더 깊숙한 곳까지 탐사를 계속하려는 리빙스턴을 남겨두고, 스탠리는 1872년 5월 잔지바르로 돌아왔다. 콩고 지역은 후일 그 자신이 탐사할 곳이었다.

영국으로 돌아와서 스탠리는 〈어떻게 내가 리빙스턴을 찾아냈는가 How I Found Livingstone〉(1872)를 펴냈다. 왕립지리학회에서는 회원들이 이 문외한의 성공적인 쾌거에 다소 감정이 상하긴 했지만, 1873년 그에게 패트론 메달을 수여했다. 1872년 8월 그는 브라이턴의 영국학술협회에서 연설을 했고, 그의 노고에 감사하는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금으로 된 코담배갑을 받았다.

1873년 스탠리는 〈뉴욕 헤럴드〉의 종군 특파원으로 아샨티(지금의 가나에 있음)에 파견되었으며, 1874년 〈쿠마시와 마그달라 : 영국군이 아프리카에서 벌인 2차례의 전투 이야기 Coomassie and Magdala : The Story of Two British Campaigns in Africa〉를 출판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에티오피아와 그곳에서의 체험을 기술했다.

콩고 발견

1873년 리빙스턴이 죽자 스탠리는 자신이 떠나온 아프리카의 탐사에 착수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나일 강의 발원지와 중앙 아프리카에 있는 호수들의 위치나 크기에 관한 문제들은 리빙스턴, 리처드 버튼 경, 존 H. 스피크, 새뮤얼 베이커 경 등에 의해 부분적으로 해결되었을 뿐이었다. 스탠리는 〈데일리 텔레그래프 The Daily Telegraph〉·〈뉴욕 헤럴드〉로부터 아프리카 원정을 위한 재정적 후원을 얻었다. 충분한 식량과 인부를 갖춘 뒤 그는 3명의 동료와 함께 1874년 11월 12일 잔지바르를 출발해 빅토리아 호로 향했다.

1875년에는 부간다의 왕 므테사를 방문했으며, 그결과 1877년 그리스도교 선교단의 입국을 허가받았다. 후에 그곳은 영국의 보호령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스탠리는 그의 보트인 레이디앨리스호를 타고 빅토리아 호를 일주하면서 그 호수의 크기와 중요성에 대해 스피크가 내렸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호수 가까이에 거주하는 의심 많은 원주민들과의 사소한 접전이나, 특히 많은 사상자를 낸 붐비레 전투는, 저널리스트의 시각으로 강압적 수단을 행사하는 이 색다른 유형의 여행자에 대해 영국 내에서 맹렬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이 여행으로 인해 훗날 영국인들 사이에는 그에 대한 평판이 나빠졌으며 '잔인한 사나이'라는 야유를 받게 되었다. 자기방어를 위한 행동을 했을 뿐이라는 그의 주장도 그 자체가 공격적인 언사로 표현되어 여론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앨버트 호 조사에 반발하는 부족의 반란으로 탐사가 저지되자 스탠리는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탕가니카 호로 갔다.

그곳에서도 역시 보트를 타고 일주하며 조사했으나 그 호수와 앨버트 호 및 나일 수계를 연결하는 출구는 찾아내지 못했다. 1876년말경 스탠리는 자신이 '가장 위대한 과제'라고 말했던 루알라바 강의 확인을 위해 떠날 준비를 마쳤다. 리빙스턴은 루알라바 강이 나일 강이기를 바랐지만 그는 콩고 강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었다.

1876년 탐사대는 리빙스턴이 도착했던 최북단 지점인 루알라바 강 근처 니앙웨에 도착해, 그 지역의 유력한 아랍 무역상인 티푸 티브와 함께 강 하류를 향해 출발했다. 여행의 극심한 어려움과 위험부담 때문에 아랍인들은 그들의 무역지역 경계선에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스탠리는 레이디앨리스호를 타고 아직 탐사되지 않은 강을 따라 하류로 항해하여 자신이 '스탠리풀'이라고 명명하게 되는 호수에까지 다다랐다.

계속해서 강 하류로 나아가다가 84m에 달하는 절벽에 형성된 32줄기의 큰 폭포를 발견하고는 이를 리빙스턴 폭포라고 이름지었다. 더이상 항해를 계속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육로로 도보행군을 강행해 1877년 8월 12일 대서양에 이르렀다. 3명의 동료와 그를 도왔던 아프리카 인부의 절반이 죽었지만 그는 마침내 콩고 강을 찾아냈다. 스탠리는 이 엄청난 여행을 〈검은 대륙을 지나 Through the Dark Continent〉(1878)에 기록했다.

콩고 강 유역개발에 대한 영국의 관심을 얻는 데 실패하자, 스탠리는 벨기에의 왕 레오폴 2세의 제안을 받아들여 '콩고 강 상류 연구개발위원회'의 후원 하에 그곳의 탐사를 지휘하게 되었다.

이 위원회는 1876년 레오폴 왕에 의해 설립된 국제 아프리카 연맹의 지부로서, 이 위원회는 후일 콩고 국제연맹이 되었으며, 여기서 콩고 자유국이 탄생했다. 1879년 8월부터 1884년 6월까지 스탠리는 콩고 강 유역에 머무르면서 하류에서 상류의 스탠리풀에 이르는 도로를 건설하고 강 상류에 증기선을 진수시키면서 일련의 정거장들을 세웠다.

온갖 어려움 앞에서 발휘된 인내심으로 그는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바위를 부수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884~85년에 개최된 베를린 서아프리카 회담에서는 레오폴 왕의 주권 아래 콩고 자유국이 승인되었다.

에민 파샤 구조

아프리카에서 이루어진 스탠리의 마지막 원정은 이집트 적도지방의 총독인 메흐메드 에민 파샤를 구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에민은 1882년에 발생한 이슬람 강림교도들의 반란으로 인해 앨버트 호 근처에 고립되어 있었다. 브리티시인디아기선항해회사의 회장 윌리엄 매키넌 경은 구조자금을 모금한 다음 스탠리에게 구조원정대를 지휘해줄 것을 요청했다.

스탠리는 자신이 잘 알고 있었던 콩고 경유노선을 선택하고 짐꾼 조달을 티푸 티브에게 맡겼다. 1887년 1월 영국을 떠나 잔지바르에서 대원을 모집하기 위해 잠시 머물렀다가, 3월에 콩고 강 어귀에 도착했고, 6월에는 배가 통행할 수 있는 강의 최상류에 이르렀다. 그곳 얌부야에서 스탠리는 최후방 종대에게 티푸 티브의 짐꾼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만약 그들이 도착하지 못하면 나중에 자신을 뒤따라 오도록 명령하고 길을 떠났다.

스탠리와 4명의 동료들은 6월 28일 선발대를 이끌고 캠프를 떠나 5개월간의 지독한 행군으로 울창한 밀림을 힘겹게 통과해 앨버트 호에 다다랐다. 그들은 1888년 4월에야 드디어 에민과 접촉했으나, 놀랍게도 에민은 자신의 구역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스탠리는 결국 에민에게 자신의 군대를 소집하도록 맡기고, 행방이 묘연한 최후방 종대를 찾기 위해 되돌아갔다. 8월 17일 그는 얌부야에 조금 못 미치는 바날리아에 도착해 물자도 떨어지고 사기가 저하되어 있는 후발대를 발견했다. 티푸 티브는 짐꾼들을 보내지 않았고, 스탠리의 장교들은 모두 죽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살해당하고 다른 한 사람도 곧 열병으로 죽었다. 스탠리는 이 참화를 죽은 장교들의 탓으로 돌렸으나,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후발대의 악운에 대해 논란이 일어났다. 이는 스탠리의 명예를 크게 훼손시킨 언쟁들 가운데 가장 적의에 찬 것이었다.

1889년 1월 앨버트 호로 되돌아간 스탠리는 에민이 불만을 품은 군대에 의해 억류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결국 그 부대는 재편성되었고 1889년 4월 10일 1,500여 명이 출발하여 12월 4일 동쪽 해안의 바가모요에 도착했다. 스탠리는 이 탐사에서 다음의 몇 가지 다른 지리학적 논점들을 명백하게 밝혀냈다. 먼저 1864년 처음으로 앨버트 호가 발견되었을 때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1876년 스탠리 자신도 주목하지 않고 지나쳤던 안개에 덮인 루웬조리 산맥은 '프톨레미의 달의 산맥'으로 확인되었다.

앨버트 호의 크기가 정확하게 측정되었고 그 호수의 지류인 세믈리키 강은 남쪽으로 흘러, 당시 스탠리가 앨버트 에드워드라 이름지었고 지금은 에드워드 호라고 불리는 호수로 이어지고 있음이 밝혀졌다. 〈암흑의 아프리카에서 In Darkest Africa〉(1890)는 스탠리가 힘겹고 불운했던 탐사에 대해 남긴 기록이다. 이 원정으로 그는 왕립지리학회가 수여하는 특별 황금 메달을 받았다.

스탠리는 1890년 7월 12일 도로시 테넌트와 결혼하고 덴질을 아들로 입양했다. 1885년 5월 15일 미국시민이 된 그는 1892년에 다시 영국으로 귀화했고, 1895~1900년에 북램버스의 자유통일당원으로 의회에서 활동했다. 1897년 그는 남아프리카를 방문하고 그 이듬해에 〈남아프리카를 지나 Through South Africa〉를 펴냈다. 1899년에는 바스의 대십자장(章)을 받아 헨리 모튼 스탠리 경이 되었다. 그는 남은 여생을 대부분 1898년에 구입한 서리 주 피르브라이트 근처의 퍼즈힐에 있는 작은 영지에서 보냈다.

스탠리에 대한 평가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스탠리에 대한 당시의 비평은 대부분 부당한 것으로 보인다. 지식 추구에 몰두하던 왕립지리학회를 중심으로 한 전문여행자 집단에게 스탠리는 이방인이자 막대한 자금을 주무르는 미국 언론인으로 보였다.

그의 탐사 동기는 언제나 의심스러웠고 그 방법 역시 거칠게 보였다. 사회계층의 배경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스탠리의 비천한 출신은 사실 그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거칠고 비협조적인 태도와 독선적이고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성품 등은 그에 대한 평판을 나쁘게 만들어 오랫동안 그의 명성에 오점을 남겼다.

그는 지독하고 유머 감각이 없으며 예민하고 참을성이 없어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었으며, 그의 주변에서 일어난 많은 논쟁들은 그가 이룩한 빛나는 업적들을 퇴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구세대와 신세대를 연결하는 다리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리빙스턴의 친구이자 두려움을 모르는 탐험가로 출발해 마침내 콩고를 발견했고, 개척자로서 콩고가 자유국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위대한 식민지 개척자인 세실 로데스의 시대까지 살았던 그는 나이가 지긋하게 든 뒤에는 영국의 정치인이 되어 아프리카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개방되는 것을 줄곧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