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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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고고학은 19세기에 들어와 근대 자연과학 연구성과와 더불어 땅에 묻힌 유물들이 드러나면서 본격화되었다. 고고학의 연구과정은 유적조사, 발굴, 해석과 복원의 3과정에 걸쳐 이루어진다.
유적조사는 자연현상이나 인간에 의한 파괴로 땅속에 묻혀 있던 유물이 지표에 드러나 흩어진 것을 야외조사를 통하여 확인하거나 탐사기구를 써서 땅속에 있는 것을 찾는 것이다. 발굴에서 드러난 유물은 실험실로 옮겨 여러 가지 분석을 거쳐 문화해석을 위한 기초자료로 쓰이게 되는데, 고고학 해석에서 큰 비중을 갖는 유적·유물의 연대를 바로 알기 위한 연대결정도 실험실에서 이루어진다. 유물과 유적의 성격을 알고 유적이 이루어질 당시의 환경과 정확한 연대를 알게 되면 고고학이 끝으로 추구하는 문화의 복원이 가능하게 된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연구주제와 과정
  3. 발달사
  4. 한국의 고고학
    1. 개요
    2. 연구성과
    3. 역사고고학

개요

문화란 하나의 집단 또는 사회가 함께하는 행위나 생각의 총체로 정의할 수 있는데, 문화의 표현인 행위에는 언어행위·사회행위·물질행위 들이 있다.

이 가운데 고고학이 주된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것이 바로 물질행위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고고학자는 유물찾기에 관한 전문기술(발굴·조사)과 아울러 문화내용을 찾아내는 능력(분석·해석·복원)을 함께 갖춰야 한다. 고고학 연구의 역사는 유물수집방법의 발달과 문화해석방법의 발전이라는 2가지 길을 걸어왔다. 유물수집에서는 자연과학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문화해석에서는 인문사회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이룩한 성과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런 점에서 고고학에는 박물학의 지식이 요구된다.

연구주제와 과정

고고학에서 다룰 수 있는 연구주제는 매우 다양하다.

돌·나무·뼈 같은 자연물을 이용하는 능력, 유물의 생김새, 식생활과 영양상태, 사냥기술이나 농사 그리고 짐승기르기 같은 생업경제, 사람의 체질 특징과 몸치장에 관한 것, 무덤쓰기와 장례의식, 사회의 노동력 규모와 구성관계, 주거양식과 마을구조, 미의식, 환경과 문화의 관계, 사회발전과정 등 사람들의 삶과 관계된 모든 것이 주제로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주제를 가지고 유물을 통하여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하였는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고고학의 연구과정은 유적조사, 발굴, 해석과 복원의 3과정에 걸쳐 이루어진다.

유적조사는 자연현상이나 인간에 의한 파괴로 땅속에 묻혀 있던 유물이 지표에 드러나 흩어진 것을 야외조사를 통하여 확인하거나 탐사기구를 써서 땅속에 있는 것을 찾는 것이다(→ 현지조사). 야외조사는 단순 채집활동이 아니라 유적의 성격을 알 수 있도록 정밀조사가 필요하며, 정확한 지점을 표시하여 유물의 공간분포를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유적조사는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굴을 위한 기초자료 수집이라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조사에 앞서 사전준비에 철저해야 하고, 유물수집뿐만 아니라 조사 지역의 생태환경·인문·역사·지리배경 등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가능한 지역을 가려뽑아 정밀조사를 해야 할 때도 있다.

지표조사에서 가려낸 주요유적은 발굴을 통해 유적성격이 뚜렷이 드러나게 된다.

발굴은 유적의 종류·크기ㆍ발굴비용과 기간에 따라 알맞은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가장 과학성 있고 정밀한 발굴방법을 써야 한다. 한번 발굴된 유적은 다시 원형대로 돌이킬 수 없을 뿐 아니라 발굴은 반복될 수 없는 작업이기 때문에 철저한 기록과 유물수집이 필요하며, 반드시 유적의 일정 부분을 남겨두어 뒷날 연구자료로 삼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발굴에서 드러난 유물은 실험실로 옮겨 여러 가지 분석을 거쳐 문화해석을 위한 기초자료로 쓰이게 된다.

유물은 크게 자연유물과 문화유물로 나뉜다. 문화유물의 분석과정은 유물 속성분류ㆍ형태분류 등 생김새에 따른 것과 유물의 재질·만듦새·쓰임새 등 성격에 관한 것들이 있다. 자연유물은 자연환경이나 생업에 관한 자료들로서 유적의 지질환경을 알기 위한 토양분석, 쌓임환경조사, 지형발달상황, 식생분석, 식물자료, 조가비·짐승뼈 등 생업에 관한 자료들이 미세분석을 통하여 밝혀진다.

여기에서 물리학·화학·생물학·지질학·기후학 등 자연과학방법이 쓰인다.

또한 고고학 해석에서 큰 비중을 갖는 유적·유물의 연대를 바로 알기 위한 연대결정도 실험실에서 이루어진다. 연대를 결정하는 방법은 상대연대측정방법과 절대연대측정방법이 있다.

상대연대는 유물의 형식을 비교하여 순서를 결정하는 것이고, 절대연대란 여러 가지 과학방법을 써서 구체적인 연대값을 얻어내는 것이다. 유물과 유적의 성격을 알고 유적이 이루어질 당시의 환경과 정확한 연대를 알게 되면 고고학이 끝으로 추구하는 문화의 복원이 가능하게 된다. 문화의 복원과정은 민족지 조사를 통한 현존 자료의 도움을 많이 받기도 하지만 역사학·민속학·인류학 등 주변 과학의 연구성과들을 이용하기도 한다. 고고학 연구는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발달사

고고학이 근대과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은 것은 19세기 유럽에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대유물에 대한 관심은 오랜 옛날부터 있어왔다. 옛사람들이 사용했던 연모를 관찰하고 연모의 발전과정을 체계있게 이해한 것이 기원전의 기록에도 보인다. 서양에서는 BC 1세기에 루크레티우스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De Rerum Nature〉에서, 연모의 발전은 사람이 손을 쓰던 단계로부터 돌과 나무를 거쳐 철과 청동을 쓰는 데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중국에서도 춘추시대의 사실을 기록한 원강(袁康)의 〈월절서 越絶書〉에는 돌연모로부터 옥돌을 거쳐 청동연모로 발전했고 당시는 쇠연모를 만들어 쓰고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이 연모의 진화과정을 일찍이 알고는 있었으나 이를 과학으로 뒷받침하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필요했다.

18세기에 들어와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에게 골동품수집열이 불어닥쳐 많은 유물들이 모아지고, 모인 유물들을 정리하면서 유물의 예술성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체계적인 분류방법도 나오게 되었다.

이무렵 덴마크의 코펜하겐 박물관에서 일하던 톰센은 전시를 위한 목적으로 유물을 분류하면서 유물의 재질에 따라 석기·청동기·철기로 나누고 순서대로 배열하였는데, 이것이 고고학 유물의 기본 분류로서 3시기 구분법이 되었다.

골동품 수집과 미술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된 고대유물에 대한 연구는 19세기에 들어와 근대 자연과학 연구성과와 더불어 땅에 묻힌 유물들이 드러나면서 본격화하였다.

지질학의 원리에서 아래 쌓인 지층일수록 오래된 것이라는 개념은 고고학 발굴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어 덴마크의 보르소에에 의해 층위에 따른 유물의 시기 구분의 기준이 되었다(→ 층서학).

생물진화의 원리를 밝힌 다윈의 진화론은 사람의 진화와 함께 물질문화의 진화에 관한 원리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는 우연한 발견물들이 대부분으로, 체계있는 발굴을 통해 수집된 유물을 대상으로 연구한 것은 아니었다. 고고학 발굴이 본격화한 것은 알렉산더 콘츠에서 비롯된다. 발굴에 측량기술을 도입하고 유물과 유구에 관한 사진과 도면을 작성하여 보고서를 간행함으로써 발굴이 보물수집의 차원에서 벗어나 과학성을 갖게 되었다.

이어 피트 리버스에 의해 유물의 3차원 좌표기록방법이 쓰이게 되었고, 트로이 유적 발굴에서는 발굴구덩을 설정한 분할발굴방법이 나타났으며, 휠러는 바둑판식 구덩발굴방법을 개발하였다.

유적조사방법도 더 나은 방법들이 나왔다. 공중촬영에 의한 유적조사, 자력계를 이용한 땅속 탐사, 잠수에 의한 물속에서의 유적조사 방법들이 개발되기에 이르렀고, 발굴중에 공기에 갑자기 노출된 유물이 삭아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유구를 미리 관찰하는 투시경이 쓰이기도 했다.

발굴에서 드러난 유물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유물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하여 유물분류학과 유물에 의한 상대연대 결정방법이 발전하게 되었다(→ 연대측정). 몬텔리우스는 유물을 유형·생김새·장식 등에 따라 분류하고 유물갖춤새에 따라 연대를 추정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특히 연대학의 발전은 고고학의 체계화에 크게 이바지했는데 피트리에 의한 교차연대법과 순서배열법은 상대연대결정에 많은 발전을 보게 하였다.

한편 유물의 절대연대를 알고자 하는 데서 여러 가지 방법들이 제시되었다. 나무의 나이테를 이용한 연대결정방법이 20세기에 들어와 알려지기 시작했고, 현세 이전의 제4기에 지구상에 4차례의 빙하기가 있었다는 이론이 나오면서 선사시대, 특히 구석기시대의 실제 연대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연륜연대학).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계기는 1949년 리비에 의해 방사성탄소(C) 동위원소를 이용한 절대연대 측정방법이 발견된 것이다(→ 탄소14연대측정법). 방사성탄소의 동위원소들이 반감기가 일정한 원리를 이용하여 유적발굴에서 나온 유기물 자료로부터 탄소를 뽑아내 연대를 측정하는 이 방법의 이용은 고고학의 혁명이라 불리울 만큼 중요한 기여를 했고, 그뒤로 여러 가지 동위원소를 이용한 연대측정방법 개발의 첫 출발점이 되었다.

고고학에서 연대관이 확립된 다음에는 고고학 자료의 해석과 복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인류학의 현지조사 자료들이 쌓이고 현존 원시사회에 관한 지식들이 전해지면서 고고학 발굴에서 드러난 자료들과 비교 검토함으로써 고고학 자료의 해석에 새로운 방향이 제시되었다.

또한 발굴에서 드러난 자연유물들의 분석을 통해 당시 환경을 재구성하게 되어 살림살이를 완전히 복원하는 데까지 발전했고, 사회발전단계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는 1960년대 이후에 등장한 신고고학의 연구성과에 힘입은 바가 크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하는 모습
고고학자들이 발굴하는 모습

한국의 고고학

개요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에게서 고대 유물에 대한 고고학적 이해의 단편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추사 김정희는 여러 지역을 답사하고 문헌기록과 유적·유물을 견주어 평가하는 안목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발견, 판독한 것은 물론 북청토성을 답사하고 돌화살촉을 발견하여 그것이 문헌에 나오는 숙신의 석노(石弩)임을 주장했다. 또한 경주평야에 있는 신라무덤을 조산(造山)이 아닌 왕릉으로 해석하고, 평양 부근에서 나온 기와에 '千秋萬歲'(천추만세)란 명문이 있는 것을 보고 글자체로 보아 전한대의 유물로 추정하는 등 고고학의 방법에 접근된 연구방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전통사회의 학문성과가 이어지지 못하고 근대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제국주의 침략에 따라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고고학도 자생발전의 길을 잃게 되었다.

일제에 의한 고고학 조사는 침략의 기초자료 수집을 위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역사·민속·산업 조사의 일환으로 문화재 및 유적조사가 전국에서 진행되었다. 1916년에는 조선고적연구회가 설립되어 평양·경주·김해 지역들에서 고고학 발굴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제하의 고고학 발굴은 도굴에 가까운 보물찾기식이었다. 우리나라 학자들의 참여가 철저히 금지된 채 일본 사람들에 의한 지시와 감독에 따라 조사되었고, 어떤 종류의 유물이 얼마나 나왔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조사가 집중된 곳이 평양과 김해 지역으로, 평양에서는 한의 낙랑군 설치를 증명하기 위해 애썼고 김해에서는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밝히기 위해 의도적인 조사를 했다.

그밖에 경주·개성·강화 등지에서는 신라ㆍ고려 때의 값진 유물들이 많이 나오는 무덤들을 파헤쳐 엄청난 양의 도자기, 귀금속 장신구, 질그릇 들을 일본에 가져갔다.

뒤에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비롯해 개성·평양 등에 박물관을 지어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의 발굴품뿐만 아니라 석탑·불상·그림 들까지 일본으로 들여간 것이 많았다. 일본 사람들은 철도공사에서 드러난 1만 기가 넘는 유적을 파헤치고 유물을 캐가기도 했다. 한편 경성제대 의학부에서는 우리 겨레의 체질과 생활수준이 낮음을 증명하려는 목적으로 체질과 토막민에 대한 연구를 했다.

이와 같이 잘못된 방향으로 진전된 고고학은 광복이 되어 일본이 물러가고 난 뒤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으나, 또다시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남과 북이 서로 다른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해방 이후의 상황은 고고학을 전문으로 훈련받은 인력이 전혀 없는 가운데 일제의 조사로 흩어진 유물들을 수습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8·15해방). 그나마 서구에서 고고학 훈련을 제대로 받고 돌아온 도유호·한흥수 등 고고학자는 북으로 들어가 남한의 경우는 더 어려웠다.

우선 문화재를 보존·관리할 수 있는 시설로서 남에서는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국립박물관으로 정비하였고 북에서는 조선중앙역사박물관을 새로 설립하였다. 고고학 발굴의 경우 남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조사했던 나머지 것들을 이어 받아 경주·개성 등지의 무덤을 정리하는 데 머물고 있을 때, 북에서는 일찍이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법령을 발표하고 각지에 지방박물관을 세워 유적발굴을 진행하였으며 과학원 산하에 물질문화사연구소를 두고 조직적인 발굴사업을 진행했다.

북에서는 6·25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인 계획경제체제로 들어가면서 건설공사장에서 드러난 유적을 공사에 앞서 치밀하게 정리하였고, 민속조사도 아울러 진행시켜 1960년대에 이미 고고학의 기반을 닦아나가고 있었다. 한편 남에서는 일부 유적에 대한 시굴 및 발굴조사가 있기는 하였으나 고고학 조사를 담당할 전문기관이나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동인회 수준의 모임을 통해 연구되다가, 1961년 서울대학교에 고고인류학과가 개설되면서 전문인력이 양성되기 시작했다.

북에서는 과학원 산하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와 지방박물관이 고고학 발굴의 중심구실을 하며 국가사업으로 진행되었는 데 비하여, 남에서는 국립박물관 중심의 조사로부터 차차 대학박물관이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고고학 연구의 큰 맥을 이루게 되었고, 이제는 전국의 공·사립대학에 고고학 관련학과들이 개설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연구성과

8·15해방 이후 우리나라 고고학의 연구성과는 비록 짧은 기간, 적은 인원으로 이룩된 것이기는 하나 몇 가지 두드러진 업적을 쌓은 바 있다.

특히 일제의 왜식사관에 의해 비뚤어진 우리의 역사를 바로잡는 데 큰 몫을 했다. 선사시대의 경우 일본 학자들은 우리나라 구석기시대에 사람이 살지 않았고 청동기시대라는 것도 없이 석기와 금속기를 함께 쓰던 금석병용기시대가 오랫동안 이어져 문화가 뒤떨어진 민족이었던 것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미 북에서는 1950년대에 청동기시대의 대규모 유적들을 발굴하여 우리에게 독자적인 청동기문화가 있었음을 밝혀내었고, 1963년에는 웅기굴포리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을 찾아 이 땅의 구석기문화 실체를 확인했다.

이어 남에서도 1964년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공주석장리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되어 수만 년 전에 이 땅에 살았던 주인공들의 모습을 뚜렷이 알게 되었다.

선사고고학에서 구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밝혔다는 것은 왜식사관의 극복일 뿐 아니라 구석기시대로부터 신석기시대를 이어 청동기시대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이른 시기의 역사를 체계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것이다. 그후 구석기시대 유적은 전국에 걸쳐 확인되었고, 적어도 70만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옛 사람의 뼈화석도 평양 역포, 단양 상시, 평양 용곡, 평양 만달리, 청원 두루봉 유적 등에서 드러났다. 구석기시대에 이어 신석기시대에는 농사를 지으며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것이 봉산 지탑리, 평양 남경, 일산 유적의 발굴을 통해 알려졌다. 청동기시대 유적들도 남과 북에서 대규모로 발굴되어 우리나라·요동·만주지역이 함께 독특한 청동기문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역사고고학

역사시대의 유적과 유물을 다루는 역사고고학에서도 해방 이후에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북에서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역사를 보충하는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중국과 공동으로 요동반도에서 발굴한 강상·누상 무덤유적은 고조선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틀을 제공하였다. 새로 찾은 고구려 무덤벽화는 삼국시대 생활상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하였고 궁터·산성터 발굴에서 나온 자료들도 역사 기록의 부족함을 채워주었다. 남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역사를 밝히는 중요한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공주 송산리고분군에서 드러난 무령왕릉은 백제왕릉으로서는 처음 알려진, 도굴되지 않은 왕릉으로 주인공을 알 수 있는 매지권(買地券), 각종 장신구, 신상 등이 나와 백제문화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경주평야의 신라 무덤들 가운데 천마총(155호)과 황남대총(98호)이 발굴되어 신라왕릉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것도 고대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무령왕릉
무령왕릉

경주 황룡사터와 익산 미륵사터의 계속된 발굴로 〈삼국유사〉의 기록을 새롭게 이해함은 물론 부족한 역사기록을 메워줄 수 있었다.

의창 다호리 움무덤유적, 삼천포 늑도, 해남 군곡리 등의 생활유적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초기역사시대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들을 제공하였다. 그밖에도 고려·조선 시대의 도자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마터들이 강진·용인 등지에서 발굴되어 도자기의 제작연대와 만듦새 등을 뚜렷이 밝힐 수 있었다.

한국의 고고학이 그동안 이룩한 성과는 크다. 그러나 남과 북이 갈라져 서로의 성과를 교환하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어려움 또한 많이 있다. 고고학은 유물의 관찰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실물을 접하지 못한 채 그림과 사진 등 간접 자료와 글만을 활용할 뿐이다. 유물의 교환전시, 상호방문연구 등이 더욱 활발히 이루어져 한국고고학이 하나로 통일된다면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