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관대첩

북관대첩

[ 北關大捷 ]

요약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정문부가 이끈 의병이 왜군을 물리치고 함경도를 탈환한 전투.

1592년 10월 20일부터 1593년 2월 28일까지 함경도에서 정문부(鄭文孚)가 이끈 의병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끈 왜군을 물리치고 함경도를 탈환한 전투이다. 함경도를 가리키는 ‘북관(北關)’이라는 명칭을 써서 ‘북관대첩’이라고 하며,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실록(宣祖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등에 관련된 기록이 전해진다.

배경과 원인

1592년(선조 25) 5월 22일 부산에 도착한 일본군은 6월 11일에는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점령했으며, 6월 26일 임진강전투에서 조선군을 물리치고 평안도와 함경도로 진격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끈 제1군과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가 이끈 제3군은 조선의 조정이 피신해 있는 평양성 공략에 나섰으며, 가토 기요마사가 이끈 일본군 제2군은 함경도 방면으로 향했다.

선조는 6월 9일(음력 4월 30일) 한양을 벗어나 피난을 가면서 아들인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과 순화군(順和君) 이보로 하여금 함경도와 강원도로 가서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게 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북상해오자 임해군과 순해군은 회령부(會寧府)로 피신했으며, 같은 해 8월 조선군은 함경북도 학성군 해정창(海汀倉)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했다.

해정창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회령을 향해 진격해오자 그곳의 아전이던 국경인(鞠景仁) 등은 반란을 일으켜 임해군과 순화군 일행을 붙잡아 일본군에 넘겨주었다. 이때 임해군 일행을 호위했던 군사들도 모두 붙잡혀 일본군의 포로가 되면서 함경도 지역이 모두 일본군에 점령되었다.

그 뒤 가토 기요마사는 국경인을 판형사제북로(判刑使制北路)로 임명해 회령을 통치하게 하는 등 명천(明川) 이북의 8개의 진들을 투항한 조선인들에게 다스리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안변(安邊)에 머무르면서, 부하 장수인 이노우에 마사타다[井上正忠]로 하여금 길주(吉州)에 주둔하며 함경도 지역을 지키게 했다.

발과 전개과정

북도평사(北道評事) 정문부는 국경인 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빠져나와 경성(鏡城)의 교생(校生)인 지달원(池達源)의 집에 숨어 있었다. 지달원은 이붕수(李鵬壽)·최배천(崔配天)·강문우(姜文佑) 등과 함께 정문부를 수장으로 추대하고 의병을 일으켜서 1592년 10월 20일(음력 9월 16일) 국세필(鞠世弼)이 장악하고 있던 경성부의 부성(府城)을 탈환하였다.

경성을 되찾은 정문부의 의병이 각지에 격문을 보내자 일본군을 피해 숨어 있던 종성부사 정현룡(鄭見龍)·경원부사 오응태(吳應台)·경흥부사 나정언(羅廷彦)·고령첨사 유경천(柳擎天) 등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각지의 무사들도 합류하면서 의병의 수는 3천 명에 이르게 되었다. 길주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1백여 명의 군사를 경성으로 보냈으나, 의병은 이들을 공격해 패퇴시켰다.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키자 회령에서는 유생 신세준(申世俊)과 오윤적(吳允迪)이 이에 호응하여 국경인을 유인하여 살해하였다. 정문부는 군대를 보내 명천을 비롯해 일본군에 투항한 세력이 차지하고 있던 나머지 진들도 모두 탈환했다. 그리고 명천의 해창(海倉)을 공격해온 일본군을 장덕산(長德山) 기슭에서 섬멸했다. 그 뒤 정문부의 세력은 길주성을 포위하였으며,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마천령 아래 영동관(嶺東館)과 쌍포진(雙捕津) 일대에 설치해 두고 있던 일본군의 성책(城柵)을 공격해 섬멸시켰다.

일본군이 길주성을 지키며 나오지 않자 정문부는 6진 지역을 순행하며 함경도의 방어 체제를 정비했다. 그리고 1593년 봄에 다시 길주성 공격에 나서 2월 23일(음력 1월 23일)에는 단천(端川)의 일본군을 섬멸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2월 28일(음력 1월 28일) 밤에 길주성을 빠져나와 도주했고, 의병은 추격에 나서 일본군을 궤멸시켰다.

결과와 영향

당시 일본군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잇따라 패하고,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에게 공격을 당하면서 병력 보충과 군수품 보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1593년 1월 15일 명나라의 원군이 도착한 뒤에 조명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2월 9일에는 평양성에서 철수해 한양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안변에 주둔하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도 한양으로 철수했기 때문에 길주성 전투 이후 정문부가 이끈 의병은 함경도 지역을 완전히 수복했다. 선조는 북관대첩에서 활약한 정문부를 영흥부사로 임명했으나, 함경도 관찰사 윤탁연(尹卓然)과의 갈등 때문에 정문부의 공은 조정에서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1707년(숙종 33) 정문부 등의 공을 기리기 위해 길주에 세워진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약탈되어 야스쿠니신사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랜 노력 끝에 2005년 10월 한국에 반환되었고, 2006년 3월에는 북한에 넘겨져 원래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현재 경복궁과 의정부의 정문부 묘소 등에는 북관대첩비의 복제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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