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부

정문부

[ 鄭文孚 ]

요약 조선 중기 문신. 임진왜란 때 회령의 국경인 등이 반란을 일으켜 적군에 투항하자 의병대장이 되어 경성을 수복하고 회령으로 진격하여 두 왕자를 왜군에게 넘겨준 국경인의 숙부 세필을 죽이고 반란을 평정하였다.
진주 충의사

진주 충의사

출생-사망 1565 ~ 1624
본관 해주
자허
농포
시호 충의
국적 조선
활동분야 정치, 군사(의병)
출생지 한성(서울)
주요저서 《농포집》
주요업적 임진왜란 참전, 관북지방 의병활동 전개
시대 조선시대(명종, 선조, 광해군, 인조)

1565년(명종 20) 한성판윤을 지낸 정신의 아들로 한성(서울)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 자허(子虛), 호 농포(農圃), 시호 충의(忠毅)이다. 1588년(선조 21) 생원이 되고 문과에 급제하였고, 한성부참군이라는 무관으로 첫 관직을 맡았다. 이후 홍문관 수찬, 시간원 정언을 거쳤고 1591년 북병영에 딸린 정육품 무관직인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가 부상을 입었으며 이후 회복하여 다시 함경도 길주(吉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을 맡았다. 함경도 회령(會寧)에서 국경인(鞠景仁) 등이 반란을 일으켜 적군에 투항하자 의병대장이 되어 반란군이 점령한 경성(鏡城)으로 진격하였다. 그리고 회령을 차지하고 두 왕자를 왜군에게 넘겨준 국경인의 숙부 국세필(鞠世弼)과 정말수(鄭末秀)를 죽이고 반란을 평정하였다. 또한 길주에 주둔한 왜적과 대치하여 혈전을 벌였으며 왜적 600여 명의 목을 베고 수많은 군장물을 획득하였다. 이를 길주 장덕산대첩(長德山大捷)이라 한다. 정문부는 길주 왜성을 포위하고 대치하였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진군해온 왜적 2만을 상대로 매복전을 펼쳤다. 왜군은 패전하여 관북지방에서 완전히 철군하여 남하했다. 이때의 승전을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에 기록하였다. (북관대첩비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2005년에 다시 반환되어, 2006년 원래 위치에 복원하기 위해 2006년 3월 1일 북한으로 전달되었다.)

1593년 영흥(永興)부사, 1597년 길주(吉州)목사가 되고, 1599년 호조참의, 1600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임진왜란 공적은 인정받지 못했다. 1612년 형조참판, 1618년 창원부사를 지냈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면서 대북파와 정치적 입장을 달리해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다시 관직에 나가 전주부윤이 되었지만 창원부사로 재직할 때 초회왕(楚懷王)에 대하여 지은 시(詩)로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1624년(인조 2) 고문받다가 사망했다. 그후 함경도 지방민의 송원(訟寃)에 따라 신원되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경성의 창렬사(彰烈祠), 부령(富寧)의 청암사(靑巖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농포집(農圃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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