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정창전투

해정창전투

[ 海汀倉戰鬪 ]

요약 임진왜란 때인 1592년 8월 함경북도 학성군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

1592년 8월 24일부터 25일까지 함경북도 (鶴城郡) 학중면(鶴中面)의 해정창(海汀倉) 인근의 (臨溟川) 유역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함경도 북병사(北兵使)인 (韓克諴)이 (六鎭)의 정예병을 모아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이끈 일본군의 진격을 막으려 했으나 패했다. 《조선왕조실록》의 ‘실록’,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에 관련된 기록이 전해진다.

배경과 원인

1592년(선조 25) 5월 22일(음력 4월 12일) 부산에 도착한 일본군은 5월 25일까지 부산진·다대포·서생포·동래성 등을 잇달아 점령하며 조선 침략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했다. 그 뒤 6월 11일에는 한양을 점령했으며, 6월 26일에는 에서 승리하며 개성마저 점령했다.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가 이끈 일본군 제1번대와 제3번대는 평안도 방면으로, 가토 기요마사가 이끈 제2번대는 함경도 방면으로 방향을 나누어 진격했다.

황해도 금천(金川)을 출발한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는 고달산(高達山, 866m)을 넘어 함경남도 문천(文川)으로 곧바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노인재(老人峙, 975m)를 넘어 (永興灣) 일대에 이르렀다. 이처럼 일본군이 험준한 산악지대를 거쳐 철령 이북 지역으로 곧바로 진출하자, 철령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던 조선군의 방어체계는 무력화되어 함경도 남병사(南兵使) 이혼(李渾)은 싸우지도 못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강원도와 함경도에서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기 위해 파견되어 있던 (臨海君) 이진(李珒)과 (順和君) 이보(李王+土)도 서둘러 함경북도 지역으로 피신해야 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부장인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와 사가라 요리후사[相良頼房]를 영흥과 북청(北青)에 주둔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계속 북진하여 8월 21일 무렵에는 남쪽의 함경남도 단천(端川)에까지 이르렀다.

발발과 전개과정

이처럼 일본군이 빠른 속도로 진격해 오자 함경북도 병사인 한극함은 마천령에서 일본군을 막기 위해 정예병인 6진의 병력을 이끌고 경성(鏡城)에서 남하하였다. 하지만 가토 기요마사는 가신인 구키 히로타카[九鬼広隆]를 단천에 남기고 곧바로 북진을 계속해서 이미 마천령을 넘은 상태였다.

길주(吉州)까지 남하해온 조선군은 신임 남병사 이영(李瑛)이 이끄는 1천여 명의 병력과 합세하여 8월 24일 해정창에서 일본군을 공격했다. 6진의 병력은 오랜 기간 과의 전투를 겪으며 잘 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투 초기에는 조선군이 일본군을 압박했다. 하지만 사격을 앞세운 일본군의 반격에 조선군은 3백여 명이 전사하고 산으로 물러났다.

조선군은 다음날 다시 공격하려 했으나, 일본군은 8월 25일 새벽 조선군의 진영을 기습하였다. 결국 조선군은 크게 패해 뿔뿔이 흩어졌으며, 한극함은 경성으로 물러났다.

결과와 영향

해정창 전투에서 6진의 병력이 패하면서 함경북도의 방어체계는 단숨에 붕괴되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길주와 명천(明川)을 거쳐 경성을 점령했다. 그리고 부령(富寧)의 고무산(古茂山)을 넘어 8월 28일에는 회령(會寧) 남쪽의 고풍산진(古豊山鎭)에 이르렀다. 그러자 회령의 아전인 국경인(鞠景仁) 등은 반란을 일으켜 그곳으로 피신해 있던 임해군·순화군 일행을 모두 붙잡아 일본군에 넘기며 투항하였다. 한극함도 국경을 넘어 여진인의 마을로 피신했다가 그들에게 붙잡혀 경원부(慶源府)로 압송되었다. 이로써 함경도 지역이 모두 일본군에 점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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