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전투

임진강전투

[ 臨津江戰鬪 ]

요약 임진왜란 때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이 임진강에서 일본군의 북침을 막으려다 패한 싸움.
언제 1592년
어디서 임진강
누가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
무엇을 일본군과의 전투

1592년( 25) 김명원은 한강 수비의 책임을 맡았다가 패하고 다시 임진강에 배치되었다. 당시 임진강의 방어를 위해 김명원 휘하의 이빈(李薲), 유극량(劉克良), 이천(李薦), 신할 부대 이외에도 제도 한응인(韓應寅)과 부사 이성임(李聖任) 부대, 전유도대장 이양원(李陽元)과 이일(李鎰)의 부대 등 세 개의 진이 포진하고 있었다. 병력 수는 도원수 밑에 7000명, 제도도순찰사 밑에 1000명, 전유도대장 밑에 5000명 등 1만 3000명이었다.

군은 북진을 목표로 서울을 떠나 임진강에 도착했으나 강의 물살이 급해 건너지 못하고 9일 동안을 기다리던 중 5월 18일에 진지의 여막에 불을 지르고, 강변에 소수의 군사만 남기고 파주 쪽으로 철수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일본군의 전세가 약한 것으로 판단 속히 싸울 것을 엄명하였다. 이에 신할이 왜병을 추격하며 강을 건너가니 조방장 유극량은 적의 유인 작전이라며 반대하다가 신할을 따라 도강했다. 김명원 역시 도하 작전을 반대했지만 명령 체계가 흐트러져 있어 이를 막지 못했다. 일본군은 움직이지 않고 조선군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서 일시에 공격하니 양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기습을 받아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조선군은 신할, 유극량이 전사하자 크게 혼란에 빠지고 적의 추격을 받아 많은 군사들이 강에 빠져 죽는 등 대패하였다.

5월 27일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철원, 평강을 거쳐 추양, 흡곡까지 북진했다. 도원수 김명원과 도순찰사 한응인은 평양 (行在所)로 철수했고, 선조는 평양 행재소에서 의주로의 몽진(蒙塵)을 고려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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