껌값이 ‘껌값’된 사연을 알려주마

껌값이 ‘껌값’된 사연을 알려주마

주제 화학공정, 보건/의료
칼럼 분류 일반기사
칼럼 작성일 201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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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2차대전이 끝난 뒤 도쿄의 거리에는 미군이 씹다 버린 껌을 주우려는 아이들이 흔했다. 미군이 진주한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질겅질겅 껌을 씹는 모습’은 미군의 상징처럼 여겨졌고, 사람들의 기억에도 새겨졌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껌이 공장제로 대량 생산되는 나라는 미국뿐이었다. 껌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된 것은 전쟁을 거치면서부터다. 그렇다면 껌은 미국의 발명품일까? 아니다. 먹어서 삼킬 의도 없이 오로지 ‘씹기’만 하는 역사는 고대 사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마야와 아즈텍 문명에서는 사포딜라 나무 수액을 끓여 만든 ‘치클’을 씹었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마스티시’라는 유향수 나무의 수지를 씹었다. 치클과 마스티시는 지금의 껌과는 달리 아무런 맛과 향이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이런 ‘씹는’ 전통은 산업화 이전까지 지속돼 왔다.

19세기 이후 많은 발명가들은 더 씹기 좋고 맛 좋은 껌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에 윌리엄 셈플, 토마스 아담스, 존 콜간 등 많은 발명가들의 아이디어가 껌에 덧붙여졌다. 오늘날과 같이 납작한 모양의 껌이 만들어진 것은 1890년이고, 풍선껌이 탄생한 것은 1928년이다.

껌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껌 베이스의 성분을 녹여 여과하고 당분, 향료, 색소 등의 첨가 성분도 녹인다. 이들을 잘 섞은 뒤 성형기를 통해 평평하거나 둥근 형태를 만들면 껌이 탄생한다. 1860년대에는 치클을 베이스로 한 껌이 상품화돼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껌 베이스를 천연 치클로 하면, 이에 달라붙어 불편하고 재료를 구하기도 힘들다. 이 때문에 치클을 대체할 물질이 필요했다. 껌의 역사를 바꾼 혁신적인 물질은 바로 ‘비닐’이었다.

초산비닐수지를 이용한 껌은 일본에서 탄생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쟁에서 진 일본에서 껌은 요즘처럼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게다가 일본에는 당시 껌의 원료인 고무가 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던 야마모토 사요지는 고무를 대체할 물질을 고민했고, 전쟁 때 방탄탱크에 사용되던 비닐이 남아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이 비닐로 껌을 만드는 데 성공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껌베이스의 원료로 쓰이는 초산비닐수지가 됐다. 덕분에 껌을 대량으로 쉽게 만들 수 있었고, 껌의 가격도 내려갔다. 결국 초산비닐수지가 껌값을 ‘껌값’으로 만들어 준 재료인 셈이다.

초산비닐수지는 무색 또는 담황색의 알맹이 혹은 유리 모양의 덩어리다. 물과 지방에는 녹지 않지만 에탄올, 초산에틸 등의 알코올류나 에스테르류에는 용해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초산비닐수지의 안전성에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지만, 식약청은 안전성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초산비닐수지는 석유 추출물이 아니라 아세틸렌과 초산을 융합해 만들어 안전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초산비닐수지를 만들기 전 단계인 초산비닐은 피부에 자극을 유발하고, 암을 유발할 수 있는 물질이다. 혹시 초산비닐수지에 초산비닐이 잔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유해성 논란은 지속되고 있다.

껌의 안전성에 대한 논란은 껌의 인기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입 냄새 제거, 졸음 방지, 긴장 완화, 집중력 강화, 치매 예방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해 껌을 찾는다. 금연, 다이어트 등을 위한 전문적인 껌 제품도 지속적으로 출시된다. 껌을 씹으면 포만감이 생겨 음식을 먹고 싶다거나 담배를 피고 싶은 욕구를 자제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껌을 씹는 것 자체가 건강에 해를 끼칠 수도 있다. 무리하게 껌을 씹을 경우 ‘턱관절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서울아산병원에서 2006년 조사 연구한 바에 의하면 성인, 청소년 턱관절 환자 중 50% 이상이 껌 씹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특히 한쪽 이로만 씹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 턱관절 장애가 생길 가능성이 더 높았다.

다이어트를 위해 무설탕껌만 찾는 것도 해결책이 아니다. 무설탕껌에는 흔히 ‘소르비톨’이 첨가되는데 소르비톨은 소장에서 잘 흡수되지 않고 설사를 유발하는 성질이 있다. 하루에 껌을 15~20개씩 매일 복용한 이들은 만성 설사와 복통, 체중 감소 등을 겪을 수 있다.

반대로 껌을 씹으면 건강에 좋은 경우도 있다. 역류성 식도염을 앓고 있다면 식후 30분 정도 껌을 씹는 것이 속쓰림 완화에 도움이 된다. 미국의 치아연구저널에 발표된 내용에 따르면 위와 식도 역류 증상을 가진 사람이 식후 30분간 껌을 씹으면 식도의 산성도가 정상 수준으로 돌아오고, 속 쓰린 증상도 3시간 정도 나타나지 않는다.

장 수술 환자들의 회복 속도를 앞당기는 역할도 한다. 미국 마운트 시나이 의과대학 마이클 해리스 박사에 따르면, 대장 절제수술 환자가 수술 후 껌을 씹으면 가스 배출과 장 운동이 빨라져 입원 기간이 단축된다. 껌을 씹으면 음식을 먹을 때처럼 신경이 자극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껌을 씹는 것은 ‘먹는다’는 것과 가까운 행동이다. 먹는 동안은 졸리지 않고, 먹는 동안은 복잡한 고민이나 불안한 생각도 사라진다. 껌을 씹는 동안 우리는 먹는 시간에 누리는 안정감과 만족감을 느끼도록 뇌를 속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전쟁 중이나 사회 혼란기에는 껌 소비량이 기하급수적인 증가를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미국의 껌 소비량은 평소보다 2배 늘었고, 군인 1명이 1년에 3,000개의 껌을 씹었다. 이런 수치들을 보면 되도록이면 껌 소비량이 늘지 않는 것이 평화로운 세상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 이소영 -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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