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이름도 퇴출된다!?

태풍 이름도 퇴출된다!?

주제 환경, 지구과학
칼럼 분류 일반기사
칼럼 작성일 2010-09-13
원본보기
태풍 이름도 퇴출된다!? 본문 이미지 1

지독하게 더웠던 지난해 여름. K씨는 더위보다 호되다는 실연을 당했다. 땀이 주룩주룩 흐르는 날씨에도 K씨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고, 식구들은 연애가 사람 잡는다며 걱정이 태산이었다.

K씨에게 그토록 깊은 상처를 준 아가씨는, 이름부터 하늘하늘 아름다운 ‘윤나비’. 하지만 K씨 가족에게 지난여름 이후 ‘나비’는 금칙어가 되었다. 어쩌다 ‘나비~’라는 말이 나올라치면 황급히 입을 막았다. 가족은 K씨가 없을 때에 혹시라도 그 이름이 거론되는 게 두려워, 별칭을 만들어 냈다.

나비는 무슨 나비, 매섭기 짝이 없는데. 해서 붙은 윤나비의 새 이름은 ‘독수리’였다. 다행히도 K씨는 이번 가을 새로운 인연을 만났다. 가족들은 “이번 애인은 독수리 같지 않아야 할 텐데”라며 기대 반 걱정 반으로 K씨의 사랑을 지켜보고 있다.

여기서 ‘나비’와 ‘독수리’는 곤충이나 동물이 아닌, 태풍의 이름이다. 2005년 발생한 태풍 ‘나비’는 막대한 피해를 가져와 더 이상 나비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대신 ‘독수리’라는 새 이름으로 교체했다. 이렇듯 태풍에는 고유한 자신만의 이름을 붙이고 있으며, 여차하면 ‘개명’할 수도 있다.

다른 자연 현상이나 재난과는 달리 태풍은 어엿하게 자신만의 이름을 갖고 있다. 한 번 발생한 태풍은 일주일 이상 지속되어, 같은 지역에 동시에 여러 개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혼선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구분하기 쉬운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태풍 이름은 태풍의 영향을 받는 14개국이 각자 자국어로 된 이름을 태풍위원회에 10개씩 제출해 사용하고 있다. 총 140개의 이름을 28개씩 5개조로 나눠 1조부터 5조까지 순서대로 쓰고, 사용이 끝나면 1번부터 다시 사용한다. 하지만 태풍으로 수많은 인명 피해와 막대한 재산 피해를 입고 나면, 그 태풍 이름은 다시 듣는 것조차 불쾌해지기 마련이다.

이에 따라 태풍위원회에서는 특정 태풍에게 피해를 당한 회원국이 해당 이름의 삭제를 요청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현재까지 16개의 태풍 이름이 퇴출되었으며, 이렇게 퇴출된 이름은 다시는 태풍 이름으로 쓰이지 못한다. 2003년 발생한 태풍 ‘수달’은 미크로네시아의 요청으로 ‘미리내’로, 2005년 발생한 태풍 ‘나비’는 일본의 요청으로 ‘독수리’로 바뀌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3년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던 태풍 ‘매미’의 이름을 바꿔달라고 요청해 ‘무지개’로 바뀌었다.

태풍에 최초로 이름을 붙인 사람은 호주 퀸즐랜드 지방 기상대에서 근무하던 클레멘트 래기(Clement Wragge)다. 1900년대 초, 래기는 난폭한 폭풍우가 발생하면 정치인을 비롯해 자신이 평소 싫어하는 사람의 이름을 붙여 예보를 했다. 아마도 이때 래기가 붙인 이름은 남자가 많았을 것이다.

태풍에 공식적으로 이름이 붙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였다. 2차 대전 이후 태평양에서 발생하는 열대폭풍을 감시하던 미국 군인들은 태풍에 보고 싶은 부인이나 애인의 이름을 붙였다. 피해를 겪은 사람에게는 끔찍한 태풍 이름이 기상 관측을 하던 누군가에게는 애타게 그리워하는 사람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태풍 이름은 여자 이름이 대부분이었는데, 1970년대 태풍에 여자 이름만 붙이는 것이 여성 차별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1978년 이후로는 여자 이름과 남자 이름을 번갈아 사용하게 됐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140개의 태풍 이름들은 저마다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는 인터넷 공모를 통해 개미, 나리, 장미, 수달, 노루, 제비, 너구리, 고니, 메기, 나비 등 10개를 태풍위원회에 제출했다. 주로 작고 순한 동물이나 식물 이름으로, 태풍이 온화하게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일본에서 제출한 이름들은 일본에서 보이는 별자리의 이름이다. 이번에 우리나라에 큰 피해를 입힌 ‘곤파스’는 일본에서 붙인 이름으로, 센타우루스자리 남동쪽에 있는 ‘컴퍼스자리(Circinus)’를 말한다. 그 밖에 독특한 이름으로는 채찍질을 의미하는 필리핀의 ‘하구핏’, 닭의 간과 벼슬이 들어간 햄이라는 뜻으로 마카오가 낸 ‘파마’ 등이 있다. 이 중 ‘파마’는 2009년 필리핀에 큰 피해를 줘 영구 제명될 예정이다.

2010년 9월에는 우리나라를 찾는 태풍이 유난히 많다고 한다. 게다가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지금까지의 태풍과는 위력이 전혀 다르며, 발생 위치와 경로에 대한 예측이 어려운 ‘슈퍼 태풍’이 등장하리라는 경고도 있다. 미국 지구물리유체역학연구소에서는 2080년경 이제껏 볼 수 없던 최대 규모의 슈퍼태풍이 발생하리라 경고하고 있다.

태풍의 강도는 중심 부근의 최대풍속을 기준으로 약한 태풍, 중간 태풍, 강한 태풍, 매우 강한 태풍으로 나뉘는데, 9월 2일 한반도를 강타한 ‘곤파스’는 순간 최대 풍속이 초속 44m 이상인 매우 강한 태풍이었다. 초속 40m의 강풍은 사람은 물론 커다란 바위까지 날려버릴 수 있는 세기다.

태풍은 충분한 열에너지와 수분, 공기를 소용돌이치게 하는 회전력에 의해 발생한다. 회전력은 지구 자전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에 수분이 충분하고 해수면 온도가 섭씨 27도 이상인 열대의 바다에서 태풍이 형성된다. 이렇게 발생한 태풍이 어디로 어떻게 지나갈지, 얼마만큼의 강도를 가질지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애초에 태풍 발생을 막을 방법은 없을까?

아직까지 태풍을 인공적으로 제어할 방법은 없다. 만일 차가운 심해 바닷물을 이용해 열대지방의 해수면 온도를 낮춘다면 태풍의 발생을 막을 수 있을까? 하지만 태풍은 지구 에너지의 순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억지로 막는다면 더 심각한 재앙을 부를 수 있다.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태풍을 미리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다.

  • 이소영 - 과학칼럼니스트

연관목차

990/16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