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복원, 어떻게 진행됐을까?

광화문 복원, 어떻게 진행됐을까?

주제 건설/교통, 인문
칼럼 분류 일반기사
칼럼 작성일 2010-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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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암으로 육중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이층의 문루를 얹은 광화문. 이층 문루로 이뤄져 멀리 조망하기 좋을 뿐 아니라 궁궐 정문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내기도 안성맞춤이다. 기단에 있는 3개의 아치형 출입문은 경복궁이 조선의 정궁이라는 위엄을 과시한다. 돌로 만든 기단 위에는 흙을 구워 벽돌처럼 만든 ‘전돌’로 나지막한 담을 둘렀는데, 여기를 장식한 팔괘문양은 유교적 이상사회를 꿈꾸는 조선조 궁궐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경복궁의 남측 정문이자 수도 서울의 상징인 광화문이 3년 8개월의 복원 공사를 마치고 2010년 8월 15일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웅장한 모습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광화문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다. 광화문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고, 옛 모습을 찾기까지 어떤 과정을 겪었을까?

광화문은 조선 태조 4년(1395년) 창건됐지만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면서 함께 훼손되고 만다. 이후 260년 정도 폐허로 남겨졌다가 고종 1년(1864년)에 이르러서야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런데 대원군이 중건한 광화문은 여러 차례 수난을 겪으면서 원래 모습을 잃게 된다. 대표적인 사건은 일제강점기인 1927년 조선총독부 건물이 완공되면서 시작됐다. 당시 광화문은 총독부 건물의 전면을 막고 있다는 이유로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선총독부 건물이 경복궁의 중요 건물인 근정전의 축과 틀어지게 배치됐다는 사실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당시 남산에 있던 일본 신사를 바라보게 한다는 게 그 이유였는데, 속뜻은 따로 있었다. 일제는 조선조 정궁의 기본 축을 변형시키고 문을 옮겨서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소행은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든 행위와 같은 맥락이었다.

건춘문 북쪽에 덩그러니 남겨진 광화문은 한국전쟁 중에 하부의 석조 기단을 제외한 상부의 목조건물마저 소실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1968년에 기단은 그대로 사용하고 상부의 건물은 철근콘크리트로 재현했지만 전면에 도로가 개설돼 일제에 의해 왜곡된 광화문의 배치 축과 위치는 바로잡지 못했다. 재료도 철근콘크리트로 복원하게 돼 일제에 의한 정체성 왜곡이 그대로 지속됐다.

결과적으로 광화문은 경복궁의 중심축과 5.6도 틀어지고 후면으로 14.5m 물러나 자리하게 됐던 것이다. 이렇게 원형을 잃어버린 광화문을 복원하자는 의견이 모아져 드디어 2006년부터 광화문을 복원하기 위한 철거 작업이 시작됐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들어섰을 당시의 광화문의 모습

조선총독부 건물이 들어섰을 당시의 광화문의 모습

한국전쟁 때 목조건물이 소실된 광화문의 모습

한국전쟁 때 목조건물이 소실된 광화문의 모습

1960년대 콘크리트로 복원된 광화문의 모습

1960년대 콘크리트로 복원된 광화문의 모습

경복궁의 정문으로 자리하고 있는 광화문의 모습

경복궁의 정문으로 자리하고 있는 광화문의 모습

광화문과 같은 역사적 건축물을 복원할 때는 지켜야 할 원칙이 몇 가지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복원이 증거(evidence)에 의해야 한다는 점이다. 담당자의 추측이나 상상에 의해 복원이 진행되면 원래 건물이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국제기구도 이런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광화문 복원에 필요한 증거는 충분한 편이었다. 일제강점기의 각종 사진자료와 당시 실측한 도면들이 존재했으며, 조선 후기 경복궁의 궁궐 배치도인 북궐도형도 남아 있었다. 여기에는 각종 건물의 위치가 비교적 상세히 묘사돼 있고 건물의 주칸, 공포형식 같은 기본적인 사항도 기술돼 있어 도움이 됐다.

그러나 이런 간접적인 사료보다 직접적인 자료가 필요하다. 따라서 실제 건물이 위치했던 곳의 발굴조사도 병행됐다. 발굴을 통해 각종 자료를 검증할 수 있었고, 이런 자료들을 토대로 설계도 진행할 수 있었다. 세부적인 건축양식은 경복궁을 비롯해 궁궐에 남아 있는 동시대의 비슷한 유형의 건물들을 참고했다.

이런 자료에도 불구하고 세부 설계에서 증거가 부족해 설계자를 곤란케 했던 것이 ‘현판’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현판은 1960년대에 복원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쓴 한글 현판이다. 하지만 건물을 ‘고종 당시의 것으로 복원한다’는 취지에 비춰볼 때 현판도 원래 것으로 복원하는 게 타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현판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부족했기 때문에 우선 일본 동경대에 남아 있는 광화문 사진을 토대로 복원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유리건판 광화문 사진에 남아 있는 이미지는 너무 작고 주변 부위가 선명치 않아 그대로 활용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컴퓨터영상처리 기법인 디지털프로세싱을 이용해 글자 형태를 추적하자 복원 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서예 전문가들은 이 안을 가지고 수차례 회의를 거쳐 최종 복원 안을 확정했다.

디지털프로세싱 기법은 기존의 아날로그 데이터에서 확실치 않은 부분들을 디지털로 전환해 작업한다. 이미지 데이터를 작은 단위의 픽셀로 처리하는 과정을 통해 더 정확한 이미지 자료를 획득할 수 있다. 만약 이런 첨단기술이 도입되지 않았다면 광화문 현판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가진 문화유산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도 그것의 과거 모습을 모르거나, 제대로 복원하지 못한다면 그 가치가 줄어든다. 광화문처럼 소중한 문화유산을 되살리는 데에는 고증과 발굴은 물론 컴퓨터를 활용한 디지털 작업도 필요하다. 앞으로도 발전한 과학기술의 힘으로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빛낼 수 있기를 바란다.

  • 김봉건 -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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