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발무

향발무

[ 響鈸舞 ]

요약 성종(1469~1494) 때 창제된 향악정재(鄕樂呈才)의 한 종목. 일명 향발(響鈸)·향발정재(響鈸呈才).

8명의 여기(女妓)가 양손의 모지(母指)와 장지(長指)에 향발을 끼고, "보허자령"(步虛子令)에 맞추어 추던 정재(呈才)가 향발무이다.

향발무의 무보(舞譜)는 『악학궤범』(樂學軌範 1493) 권5의 시용향악정재(時用鄕樂呈才)에 전한다. 조선후기 궁중잔치 때 공연된 향발무는 여러 의궤(儀軌)에 나온다.

『악학궤범』 권5 소재 향발무

『악학궤범』 권5 소재 향발무

1630년(인조 8) 대왕대비(大王大妃)의 진풍정(進豊呈) 때 향발은 헌선도(獻仙桃)·수연장(壽延長)·금척(金尺)·봉래의(鳳來儀)·연화대(蓮花臺)·포구락(抛毬樂)·처용무(處容舞)와 함께 공연됐다고 『풍정도감의궤』(豊呈都監儀軌)에 전한다.

숙종 기해년(1719) 『진연의궤』(進宴儀軌)에 의하면, 1719년(숙종 45) 숙종의 보령 육순(六旬)을 축하하기 위한 대전진연(大殿進宴)의 칠작행례(七爵行禮)에서 향발은 제5작 때 "보허자령"의 반주음악으로 공연됐다.

영조 갑자년(1744) 『진연의궤』에 의하면, 1744년(영조 20) 중궁전(中宮殿)과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의 내연 및 영조를 위한 구작행례(九爵行禮)에서 향발은 제5작·제8작 때 공연됐다. 『진연의궤』(1719), 『진연의궤』(1744), 그리고 순조(1800~1834) 때 『진찬의궤』에 의하면, 향발무는 무고(舞鼓) 등과 더불어 공연된 중요한 정재의 한 종목이었다.

향발무-국립국악원 무용단(국립국악원 제공)

향발무-국립국악원 무용단(국립국악원 제공)

『평양속지』(平壤續誌)에 의하면, 평양교방(平壤敎坊)에서 1730년(영조 6) 평양교방 소속 영기(營妓)와 부기(府妓)가 이 정재를 공연하였다. 『교방가요』(敎坊歌謠 1872)에 의하면, 19세기 후반 진주교방(晉州敎坊)에서 공연된 교방춤의 한 종목인 향발무는 1867년(고종 4)부터 1870년(동왕 7) 사이 정현석(鄭顯奭)이 진주목사(晉州牧使)로 지냈을 때 진주교방에서 연행됐다. 19세기 평양교방(平壤敎坊)에서 연행됐다고 이만용(李萬用)의 「이선악부」(離船樂府)에 전한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6.2414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270, 322~23, 325, 327~28, 354, 356, 508, 509쪽
  • 『악학궤범용어총람』 송방송, 서울: 보고사, 2010년, 389쪽
  • 『國樂大事典』 張師勛, 서울: 세광음악출판사, 1984년, 8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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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행을묘정리의궤 / 향발

원행을묘정리의궤 / 향발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어

향발정재(響鈸呈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