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포리 유적

후포리 유적

[ 蔚珍 厚浦里 遺蹟 ]

지역 울진
돌도끼 출토 광경

돌도끼 출토 광경

경상북도 울진군 후포면 후포리에 있는 신석기시대 무덤 유적으로, 1983년 길을 내는 공사 중 유물이 노출되어 그 해 4~5월에 발굴하였다. 후포리는 해발 400m가 넘는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 농경지가 별로 없는 곳으로 유적이 발견된 곳도 동·남쪽이 단애인 해발 45m의 등대산 정상부에 있다. 인골와 껴묻거리(副葬品)가 나온 유구는 10~20㎝정도의 표토 아래 부식토층인데 지점에 따라 흑갈색, 적갈색, 황갈색을 띄는 단단한 찰흙이 있으며 여기에 조가비와 목탄이 섞여 있다.

그 아래는 생토층이다. 부식토층의 가장자리부분에 화강암괴가 불규칙한 간격으로 노출되어 있는데 위 유구는 7개의 화강암 덩어리에 의해 돌려진 4.5×3.5m의 긴타원형의 자연 구덩이를 이용하여 매장지로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구는 아래, 가운데, 위층으로 대략 나눌 수 있으나 사람들이 뚜렷한 시간 차이를 두고 묻힌 것이 아니라 점이적으로 묻힌 것으로 보고 있다.

인골은 구덩이 중앙부를 중심으로 놓여진 것 같다고 한다. 인골은 주로 세골장(洗骨葬)의 방법으로 묻혔는데 매우 부식이 심한 상태로서 정확한 시신의 수를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최소 40인 이상이 묻혔으며, 남녀가 비슷한 비율을 차지하고 주로 20대 젊은 층이라고 판명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로 이처럼 거의 동시에 많은 사람을 묻었으며 이러한 독특한 집단무덤의 출현 배경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현재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껴묻거리로는 특별히 긴 도끼류가 나왔는데 약 180여 점에 이른다. 이들은 시신을 덮을 때 썼던 것으로 나타났다. 도끼는 날쪽으로 가면서 폭이 넓어지는 것과, 가운데 부분이 넓고 날쪽으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2가지로 나뉜다. 날은 이른바 끌날과 조갯날이 있다. 또 길이 5㎝가 안되는 작은 도끼도 상당수 있으나 대부분이 20㎝이상의 긴도끼류인데 이들도 다시 폭이 좁고 두께가 두꺼운 것과 폭이 넓고 두께가 얇은 것으로 나뉘어진다. 앞의 것은 주로 편마암, 뒤의 것은 주로 호온펠스로 만든 것이나 이러한 형태상의 차이는 암질이 제한하는 것이며,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등대산 단애의 암질 가운데 이와 비슷한 것들이 발견된다고 한다.

도끼들도 풍화를 받았는데 암질 감정에 의하면 묻을 당시 이미 사용되었던 것도 있다고 한다. 작은 돌도끼류는 옥돌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돌로 만든 치레걸이(裝身具) 2점은 평면형태가 유선형에 구두주걱 같이 한쪽 면이 약간 오목하게 들어가고 뒷면은 볼록하게 간 것이며 구멍이 뚫려있다. 대롱구슬(管玉) 2점, 구멍 뚫는데 썼을 듯한 작은 돌막대(石捧)도 있다. 암질분석자들은 보고서에서 사용된 석재의 희귀성과 굳기, 풍화에 대한 내구성 등을 기초로 하여 사용자의 신분, 사용용도 등의 규명을 한다면 조금 색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유적의 해당시기는 신석기 늦은 시기로 잠정적으로 추정되었으나 토기가 1점도 나와주지 않아 연대를 확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인골과 옥(대롱)구슬, 긴도끼들이 나와 자주 비교되는 춘천 교동 유적의 경우 신석기 늦은 시기로 보아왔던 것이 추정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교동 유적의 해당시기를 신석기 이른 시기로 보려는 견해도 있어 후포리 유적의 연대는 더욱 유동적이다.

이와 같이 후포리 유적의 경우는 앞으로 해명되어야 할 많은 연구과제를 남겨놓고 있다. 즉 한국에서 신석기시대 무덤이 드문 가운데 특별히 인골이 많이 발견되어 형질인류학적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한 점, 특별한 연령층의 젊은 남녀가 집단으로 묻힌 이유, 이들의 생업, 자연 지형을 이용한 무덤방, 드문 장제(洗骨葬), 특별한 껴묻거리, 유적의 정확한 연대 등이 모두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 蔚珍厚浦里遺蹟(국립경주박물관, 199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