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망전

왕망전

[ 王莽錢 ]

신(新, 8~23)을 건국한 왕망(王莽)이 발행한 화폐를 총칭한다. 왕망은 새로운 국가의 정치이데올로기를 고문(古文)에 두고, 이를 통해 전한대(前漢代)로부터 전해내려오던 제도를 바꾸려 하였다. 이러한 제도개혁 중 큰 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 화폐개혁과 새로운 돈의 발행이다. 신나라가 멸망하기까지 전후 4차에 걸쳐 화폐를 발행하였다. 왕망이 발행한 화폐의 내역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居攝 2年(7년)

大泉五十, 一刀平五千, 契刀五百

始建國元年(9년)

小泉直一, (大泉五十)

始建國 2年(10년)

泉貨六品, 金貨一品, 銀貨二品, 龜貨四品, 貝貨五品, 布貨十品

天鳳元年(14년)

貨布, 貨泉

이상과 같이 다양한 종류의 화폐를 자주 발행하게 되자 그 중 일부는 당대(唐代)에도 미처 다 사용되지 못한 것들이 생기게 되었다. 십포(十布) 중 소포일백(小布一百)의 경우가 그러한데, 전세되거나 발견되는 것이 적어 현재 단 1매만이 상해박물관에 수장되어 있을 뿐이다. 또 신나라가 갑작스럽게 멸망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려다 중지된 것도 있다. ‘수천오일(銖泉五一)’의 명문이 있는 전범(錢范)이 그러한 예에 속하는데, 문헌이나 고고학적 발굴품 중에 아직까지 이와 같은 화폐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일부의 연구자들은 이것이 소위 ‘신폐십일주(新幣十一銖)’ 중의 하나였다는 견해를 제기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어떠한 분석에서도 ‘수천오일’이 실제적으로 유통되지는 못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전범에서 확인되는 규모로 보아 기왕에 발행된 것 중 ‘대천오십(大泉五十)’에 비교적 가까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외 신나라 당대에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일반민들까지를 고려한 것이 아닌 상층의 귀족이나 대관부(大官府)에서만 통용된 것이 있는데, ‘국보금궤직만(國寶金匱直萬)’이 그것이다. 이는 일반의 화폐가치를 초월하는 대액면가(大額面價)의 화폐로서 왕망이 말년에 주조하였다고 한다.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에 이에 대한 기록이 언급되어 있는데, 황금 1만근의 가치를 1궤로 하였다고 하며, 그 가치의 초대(超大)함에 어울리게 모양도 일반의 화폐와는 달랐다고 한다. 즉 상하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상부는 네모난 구멍에 원형의 테두리가 있는 형태이고, 하부는 방형(方形)으로 되어 있다고 하며, 현재 단 2매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왕망이 발행한 화폐 중 가장 유통이 많이 된 것은 ‘대천오십(大泉五十)’과 ‘화천(貨泉)’이다.

화천(貨泉)은 중국 신나라 왕망(王莽) 때 제작된 화폐로서 14년에 주조된 것이다. 원형 안에 네모 구멍이 있는 형식으로 직경은 대략 2~3㎝ 내외이다. 동전 내외에 테두리 곽(郭)이 둘러 있으며, 네모구멍 좌우에 화천(貨泉) 2자가 전서체(篆書體)로 배치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남해도서지방에서 여러 점 발견된 바 있는데, 제주시 건입동(健入洞) 산지항에서 화포(貨布), 대천오십(大泉五十), 오수전(五銖錢) 등의 다른 신대(新代) 화폐와 함께 20여 점이 출토되었다. 그밖에 제주 애월읍 곽지리(郭支里), 전남 해남 군곡리(郡谷里) 등지의 조개무지에서도 출토되었다.

화포(貨布)도 중국 신(新)나라 왕망(王莽) 때 제작된 화폐로서 14년에 주조된 것이다. 모양이 중국 전국시대 포전(布錢)과 유사한데, 네모모양의 머리(方首) 한 가운데 구멍이 있다. 어깨에 턱이 형성되고 포전 양 측선이 안으로 완만하게 곡선을 이루며 움푹 들어갔다. 두 다리는 네모모양의 방족(方足)을 이루었다. 보통 길이 5.6㎝, 중량 16.5g인데, 뒷면 한 가운데 세로로 돌기선이 장식되고 양쪽에 전서(篆書)체의 ‘화포(貨布)’ 2자가 배치되어 있다. 화포 1매는 화천(貨泉) 25매에 해당한다.

한국에서는 제주시 건입동 산지항에서 1928년에 공사하다가 절벽 아래에서 화천, 오수전, 대천오십 등의 다른 신(新)대 화폐와 함께 발견된 바 있다.

이들 화폐는 중량이나 제도면에서 볼 때 전한대(前漢代)에 널리 통용된 오수전(五銖錢)에 가장 가까운 특징을 보인다. 따라서 후한의 화폐에 익숙해 있던 일반민들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화폐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 널리 유통되었다. 이들 화폐의 유통은 비단 중국 내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요녕(遼寧)의 한군현 변연 지대와 한반도 깊숙한 곳에까지 이르렀다.

한국의 전라남도 거문도, 제주도 산지항, 해남 군곡리 조개무지, 마산 성산 조개무지, 창원 다호리 유적 등에서 발견된 다량의 ‘대천오십’과 ‘화천’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왕망이 발행한 일련의 화폐는 짧은 기간동안 너무 많은 종류가 발행되고 이를 국가내 모든 성원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정상적인 화폐 유통질서를 교란시키고 명목적인 가치와 실제적인 가치가 유리되는 폐단을 낳게 하였다. 그러나 전한 중기로부터 혼란상을 보이던 화폐제도를 강력한 중앙정부의 의지 하에 재정비하고 획일화하려는 노력을 보였다는 점에서는 나름의 의의를 갖는다.

참고문헌

  • 철기시대의 사회와 경제(李淸圭, 韓國史 3-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國史編纂委員會, 1997년)
  • 錢幣學綱要(史松霖, 上海市錢幣學會, 1995년)
  • 古錢小辭典(朱活, 文物出版社, 1995년)
  • 中國文物考古辭典(何覽武·王秋華, 遼寧科學技術出版社, 1993년)
  • 朝鮮古文化綜鑑(梅原末治·藤田亮策, 養德社, 19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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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전의 하나인 화천

왕망전의 하나인 화천 출처: 미술대사전(용어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