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회주의 운동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

사회주의 운동은 마르크스(K. Marx)와 엥겔스(F. Engels)에 의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발견하고 결국은 사회주의 사회로 전환된다는 이론에 의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실제로 노동자 중심의 '국제노동자협회(제1차 인터내셔널)'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사회를 실현시키려고 하였다. 이 때 유럽 사회에서는 느슨한 형식의 사회주의 정당들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보다 강력한 체제의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였다(1917. 11). 그리고는 코민테른(Comintern : 국제공산주의)이라고 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는 강력한 국제조직을 형성하였다. 이는 폭력혁명을 수반하는 강력한 공산주의 사회를 추구하였다. 반면 서유럽사회는 이것을 독재정치라 비난하고, 의회를 통한 점진적 사회주의를 추구하였다. 결국 서유럽의 사회주의는 비공산주의적인 사회주의인 셈이다.

한국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은 일제 강점기 때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민족운동의 한 방편으로 나타났다. 민족운동가 신규식(申圭植)은 청년인재를 양성하고 중국혁명가들과의 유대를 위해 동제사(同濟社)라는 단체를 조직 운영하였다. 그런데 당시 스톡홀름에서 국제사회주의자대회(제2차 인터내셔널)가 열리는 시기여서, 그곳에 한국의 독립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1917년 8월 중국 상해에서 '동제사'란 이름을 '조선사회당'으로 개칭하였던 것이 한국 사회당의 시초이다. 즉, 이념적 측면보다는 민족운동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 1년 뒤, 1918년 6월 이동휘(李東輝) 등이 러시아의 하바로브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후에 상해로 옮겨 '고려공산당'이 되었다. 한편, 1918년 1월에는 이르쿠츠크에서 김철훈(金哲勳) 등에 의해 한인공산당이 조직되었는데, 이는 후에 '전로고려공산당(全露高麗共産黨)'으로 개칭되어 볼셰비키 공산당과 직결되는 조직으로서, 상해파와 대립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1922년 이후 코민테른에 의해 모두 해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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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의 사회주의 움직임은 3·1운동 이후에 항일운동과 민족 재생의 방편으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전통적 민족주의 운동에서 벗어나 계급적 사회주의 운동으로 일제에 대항하려 하였다. 일본 유학생 중심의 사회주의 조직인 흑도회(黑濤會)가 조직된 후(1921. 11. 29), 풍뢰회, 흑우회, 불령사, 북성회, 북풍회, 일월회, 무산자동지회 등 여러 조직이 출현하였다가 소멸되기를 반복하였다. 이들 조직들은 고학생이나 무산자, 무산계급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한결같이 무산자계급 해방과 계급투쟁을 주장하였다. 1923년 7월 7일, 신사상을 연구한다는 목적으로 '신사상연구회'를 조직한 후, '화요회'(마르크스 생일이 화요일)로 바꾸었다. 후에 상하이에서 조봉암(曺奉岩), 박헌영(朴憲永), 김단야(金丹冶) 등이 귀국, 동참하여 강화되고, 북풍회와 유대관계를 맺고,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조직시에 핵심 역할을 하였다. 이 밖에도 토요회, 조선노동당, 서울청년회, 사회주의자동맹, 혁청당 등이 출몰하였다. 그러나 각 조직의 분명한 사상적 기저가 분명치 않았고 항일투쟁의 과정에서 공동의 목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 경계선이 모호하여 이합 집산이 거듭되었다.

항일운동 과정에서 민족주의 단체와 사회주의 단체가 단결을 꾀하였으나 실패한 역사가 있다. 첫째, 신간회(新幹會) 운동으로, 1927년 2월 항일운동을 위해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협동으로 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그러나 결국 두 세력간의 비난과 갈등으로 두 이념이 결합된 대중적 민족주의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1931년 5월 해체되어 통일전선이 불가능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둘째, 조소앙(趙素昻)의 삼균주의(三均主義)이다(1946). 그는 민족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3대 사상을 종합하여 정치적, 경제적, 교육적 균등을 핵심 실천요소로 하고, 개인, 민족, 국가간의 평등을 기본 목표로 하는 독창적 모델을 제시하며 민족이 대동단결할 것을 강조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광복이후에는 1945년 8월 15일 원세훈(元世勳)이 발기한 '고려민주당'이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한 최초의 정당이었다. 그러나 직후에 여운형(呂運亨), 장건상(張建相) 등이 조직한(1945. 11. 12) '조선인민당'이 비공산주의적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을 이루었다. 이 당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반동분자만을 제외하고 노동자, 농민, 소시민, 자본가, 지주까지도 포함한 전인민을 대표하는 대중 정당'이라고 노선을 밝혔다. 그러나 이 당은 신탁통치문제,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 미·소공동위원회 등의 대책에서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에 동조함으로써 본질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삼균주의를 주장했던 조소앙은 김구(金九)와 결별하고 '사회당'을 창당하였다(1948).

박헌영이 다시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조선신민당을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을 결성하자, 여운형은 백남운(白南雲), 이영, 이상백(李相佰), 장건상, 김성숙(金星淑) 등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여 대립하였다(1947. 5. 24). 그러나 그 해 상대당원에 의해 여운형이 암살되자 당은 해체되고, 6·25전쟁 이후 좌파성향의 백남운, 이영 등은 월북하고, 우파성향의 장건상, 김성숙 등은 남한에 잔류하였다. 광복 직후 정치적 혼란기에 사회주의를 표방한 자라고 하더라도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멀어 오늘날의 이념적 잣대로 명확이 분류하기는 어렵다.

남·북으로 이념적 분단이 된 상황에서 남한에서는 민주주의 체제로 독립국가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 속에서 민주적 사회주의 성향의 정당인 '진보당(進步黨)'이 조봉암, 서상일(徐相日), 윤길중(尹吉重) 등에 의해 결성되었다(1956. 5). 조봉암은 국민적 지지를 받아 제3대 대통령에 출마하여 이승만과 대결하였다. 그러나 진보당은 조봉암계와 서상일계로 분열되었다. 조봉암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반독재 민주화투쟁과 국민 대중의 복지향상을 위해 투쟁하다가 이른바 '진보당 사건'이 발생하여, 20여명의 지도자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당은 불법화되었다(1958. 2. 25). 대법원의 재판에서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조봉암만은 사형 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되었다(1959. 7. 30). 남한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어려워짐을 나타내는 사건이었다. 4·19 혁명 이후에도 사회주의 운동은 맥을 이어, '사회대중당'이 형성되어 원내에 진출하였고(1960. 7. 29), 통일사회당이 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남한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은 빈사상태에 빠졌다.

북한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폭력적 공산주의 혁명을 달성하고, 사상면에서 유일체제의 독재국가로 변모하였다. 북한의 남한에 대한 무력행사는 남한 국민들로 하여금 공포감과 증오감을 갖게 하였고, 비공산주의적 사회주의마저 경계하게 되었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에의 과정 정도로로 간주되어, 그 결과 서유럽 사회 등에서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사회주의가 냉전시대의 대립점 분단국가인 한국사회에서는 뿌리내릴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