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식

신규식

[ 申圭植 ]

요약 항일 독립운동가.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대한협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도 가담하였다. 조국의 장래를 근심하여 단식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출생-사망 1879.1.13 ~ 1922.9.25
본관 고령
공집
예관 ·일민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충북 청주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주요저서 《한국혼》《아목루》

1879년 충청북도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 공집(公執), 호는 예관(睨觀)·일민(一民)이다. 서울로 상경하여 관립 한어학교(漢語學校)에서 중국어를 배웠다. 이후 대한제국에서 신식군대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였고 1902년 육군보병 참위가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죽음으로 항거하려고 음독했다가 실패, 오른쪽 눈만 실명하였다. 그래서 홀겨본다는 의미의 '예관'이라는 호를 썼다고 한다. 1906년에는 정3품 육군 부위(副尉)로 승진하였다. 하지만,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압하여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이후 분개하여 부하를 이끌고 저항하였다가 일본군에 밀려 폐퇴하고 1906년 9월에 면직되어 군복을 벗게되었다.

이후 황성광업주식회사 설립에 가담하여 광산산업을 했으며 공업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대한협회에 가입하여 애국계몽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활동하다가 국권피탈의 소식에 분개하여, 다시 음독자살을 기도했으나 대종교 종사(宗師) 나철(羅喆)에 의해 구조되었다. 일본의 탄압이 심해지자 국내에서 더이상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191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중국의 혁명가들과 친교를 맺었으며 쑨원[孫文]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 가담하였다.

1913년 경에는 중국 국민당 요인들과 한·중 연합단체인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결성하고, 1915년 박은식(朴殷植)과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 잡지 《진단(震檀)》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신한혁명당을 상하이 지부를 맡았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의정원(議政院) 부의장에 선출, 법무총장을 거쳐 1921년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이 되었다. 이 해 광둥[廣東]의 신생 중화민국 정부에 대사로 부임,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고 중국의 북벌서사식(北伐誓詞式)에도 참가하였다. 1922년 임시정부 안에 내분이 생기자 조국의 장래를 근심한 나머지 25일간 단식을 계속하다 목숨을 끊었다. 저서에 《한국혼(韓國魂)》 《아목루(兒目淚)》가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