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단야

김단야

[ 金丹冶 ]

요약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1922년 상하이에 망명하여 고려공산청년단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 창당에도 참여하였다. 상하이에서 활동을 계속하던 중 소련의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출생-사망 1899 ~ 1938
본명 김태연(金泰淵)
별칭 김주(金柱)·추성(秋星)
국적 한국
활동분야 사회주의 운동

본명은 김태연(金泰淵)이며, 김주(金柱)·추성(秋星)이라고도 불리었다. 1899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나 1915년 대구의 계성학교(啓聖學校:계성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고, 재학 중 일제의 조선지배가 정당하다는 미국인 교장을 반대하는 동맹휴학을 주동하여 퇴학당하였다.

1917년 일본의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다니다가 같은해 9월 귀국하여 서울의 배재학교(배재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3·1운동 때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주동하여 검거되었으며, 출옥 후 적성단(赤星團)에 가입하여 독립자금을 모금하였다.

1919년 12월 [上海]로 망명하였으며, 1921년 3월 고려공산청년단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가 같은해 8월 책임비서가 되었고, 이어 10월 이르쿠츠크파 상해지부에 입당하였다.

1922년 3월 상하이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을 결성하고 이 단체를 서울에서 재결성하기 위해 잠입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1924년 1월에 출옥한 후 《》 기자로 활동하면서 단체인 신흥청년동맹·화요회에 가입하였으며, 그해 4월에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25년 2월 화요회가 전조선운동의 조직적 통일과 근본 방침을 토의하기 위하여 주도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어 4월에 고려공산청년회 창립에 참가하여 조사부를 맡았다. 같은해 5월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에 선임되었으며, 이어 12월에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26년부터 2년 동안 의 국제레닌학교(각국의 사회주의 책임 일꾼 양성소)에서 수학하였으며, 이후 코민테른(인터내셔널_제3인터내셔널) 조선문제위원회에서 활동하다가 1929년 6월 "지식인 조직이었던 조선공산당의 파벌 투쟁을 없애고 당에 노동자와 농민을 많이 끌어들이라"는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따라 국내로 잠입하여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 2월 검거망을 피해 모스크바로 갔다가 9월에 상하이로 가서 《콤뮤니스트》를 발간하였다. 1934년 모스크바의 조선민족부 책임자가 되어 한국인 유학생을 관리하였으며, 같은해 (朴憲永)의 부인이었던 주세죽(朱世竹)과 재혼하였다.

1937년 11월 일본제국주의 밀정이라는 한국인 사회주의자의 밀고로 소련의 비밀경찰에 체포된 뒤, 반혁명 폭동과 반혁명 테러 활동을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의 지도자로 판결되어 1938년 사형당하였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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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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