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산비명

사산비명

[ 四山碑銘 ]

요약 통일신라 말기에 최치원(崔致遠:857∼ ?)이 지은 4개의 비문.

4개의 비문은 지리산의 쌍계사진감사대공탑비, 만수산의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초월산의 대숭복사비, 희양산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 적혀 있는 금석문이다. 이 중 대숭복사비는 현재 비문만 전한다. 신라말과 고려초의 불교·역사·문학·정치·사상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문헌으로 많은 해설서가 나왔다.

진감선사대공탑비는 신라의 고승 혜소(慧昭:774∼850)의 공덕을 기려 세운 탑비이다. 최치원이 직접 글씨를 썼으며, 현재 경상남도 하동군 쌍계사 대웅전 앞에 있으며 국보 제47호로 지정되었다. 4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단은 서론으로 진감이 당나라로부터 선을 전한 인물임을 밝혔고, 2단에는 혜소의 생애와 공덕을 자세히 서술하였다. 3단은 비문의 찬술 과정을, 4단은 사언고시체 게송을 담고 있다.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성주산문의 개조 무염(無染:801∼888)의 공덕을 기린 묘탑비이다. 충청남도 보령군 성주사지에 있으며 국보 제8호로 지정되었다. 무염의 제자들이 기록한 행장을 바탕으로 최치원이 비문을 만들고, 글씨는 최언위가 썼다. 내용은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1단은 무염의 입적과 비문 찬술과정을 담고 있으며, 2단에는 무염의 생애와 공덕을 기술하였다. 3단에는 오언고시체 70구가 적혀 있다.

지증대사적조탑비는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道憲)의 공덕을 기록한 탑비이다. 현재 경상북도 문경군 봉암사 금당 오른쪽에 세워져 있으며,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지증은 다른 선문의 개산조들과 달리 당나라에 가지 않고 혜은으로부터 북종선을 이어 희양산문을 이루었다. 882년(헌강왕8) 입적하였다. 시호는 지증이고 탑호는 적조(寂照)이다. 비문의 글씨는 분황사 승려 혜강이 썼다고 한다. 서(序)와 명(銘)으로 되어 있다. 서는 신라의 선종사를 간략히 기록한 것으로 도헌이 도의의 법을 이었음을 알 수 있고, 명은 도헌의 생애를 칠언시로 기록한 것이다.

초월산대숭복사비는 앞의 세 비와 달리 신라 왕실 사찰이었던 대숭복사의 유래를 기록하였다. 본래 이 절은 곡사(鵠寺)라 하였으나 원성왕 때 풍수지리설에 의해 인근으로 옮기면서 대숭복사(大崇福寺)라 하였다. 현재는 경상북도 월성군에 절터만 전해진다. 최치원은 왕명으로 885년(헌강왕11)부터 비명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는데, 헌강왕과 정강왕이 잇달아 사망하는 등 왕실 내부에 어려움이 많아 진성여왕 때 완성하였다.

4개의 비문 모두 사륙변려문이라는 문체로 기록되어 있어서 읽기 어렵다. 사륙변려문은 한나라 때 발생해 남북조시대 때 전성기를 누렸던 한문 문장으로, 당나라에서는 공문서에도 이 문체를 사용하였다.

내용이 쉽지 않아 예로부터 많은 해설서가 나왔는데, 유명한 것으로는 철면노인과 박한영의 주석본이 있다. 광해군 때 철면노인이 《사산비명》이란 이름으로 낸 주석서는 현존하는 최고의 해설서이자 가장 정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