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양산문

희양산문

[ 曦陽山門 ]

요약 경북 문경군 희양산 봉암사(鳳巖寺)에 지증도헌(智證道憲)이 개창한 북종선(北宗禪) 계열의 산문.

법맥을 이은 신행(愼行)―준범(遵範)―혜은(慧隱)―도헌―양부(楊孚)―남종선을 받아들인 긍양(兢讓)―형초(迥超)―종풍(宗風)을 세운 지공(志空)으로 이어졌다. 계보는 중국 선종의 4조 도신(道信)의 법을 받은 법랑(法朗)―북종선 나중에는 절 이름이 산문 이름이 되어 봉암산문(鳳巖山門)으로도 부른다. 후삼국 통일 전야인 935년에 긍양이 희양사에 도착했을 때 봉암사는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고 증언하고, 또한 그의 새김글에는 할아버지격의 도헌이 쌍계사 혜명에게 남종선을 받은 것으로 고쳐져 있다.

이러한 법계(法界) 변조는 직접적으로는 왕건의 고려 건국에 따른 새로운 종교와 정치관계의 재편성에 이유가 있었으며, 간접적으로는 남종선 일색인 당시 불교계의 분위기를 감안한 데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혜능(慧能)의 남종선이 고려 초의 선문을 주도하였음을 반영하는 법계 변조에도 불구하고 희양산문의 저류에는 북종선의 흐름이 있었다. 그리고 봉암사의 소진(燒盡)과 긍양의 법계 변조를 통해 후삼국시대의 정책방향이나 사회변동이 매우 역동적이었음과 함께, 후삼국 말기의 고려-후백제 전쟁에서 봉암사가 차지하는 지정학적 중요성과 왕건의 고려 건국에 즈음한 대불교정책의 한계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도헌의 행적과 긍양의 초기 공주생활에서 9세기 중반부터 민(民)의 성장이 일정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러한 성장을 배경으로 9세기 말(889) 진성여왕대의 농민전쟁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봉암사의 창건과 붕괴현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신라 말 민의 성장과 함께 민의 힘에 의해 선종의 성장이 이루어지나, 진성여왕 이후의 거국적 반란에 의식이나 행동을 같이하지 못하여 왕권이나 지방의 유력자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에 따른 민의 반감을 유발하여 일시적이나마 세력이 약화된 일이다. 이후에 봉암사의 중창을 긍양이 추진하여 고려왕실에 의해 우뚝 선 것도 초기 선종의 건강함을 상실한 징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희양산문 본문 이미지 1
수미산문사굴산문희양산문성주산문실상산문가지산문동리산문봉림산문열반종법상종화엄종법성종계율종분황사부석사법흥사봉암사성주사(보령성주사지)경복사금산사실상사봉림사통도사태안사보림사사자산문신라발해굴산사5교9산

참조항목

구산조사, 북종선

카테고리

  • > >
  •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