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 9산

선종 9산

[ 禪宗九山 ]

요약 교종(敎宗)에 반발하여 신라 하대(下代)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선종의 9개 종파. 경전이라는 기성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하여 호족의 환영을 받았다.

화엄종(華嚴宗)으로 대표되던 교종(敎宗)은 소의경전(所依經典) 즉, 경전에 의하여 그 종파(宗派)를 구별하였다. 이러한 교종는 일찍부터 왕즉불(王卽佛) 사상이나 인과응보설(因果應報說)에 근거를 둔 전생윤회사상(輪廻轉生思想) 등을 내세워 중앙집권체제를 강조하였고, 현실에서의 진골귀족들의 신분적 특권을 옹호하는데 이용되었다. 말하자면 교종은 왕실불교·귀족불교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 아래에서 귀족사회의 환영을 받았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일반 백성에게서 멀어져 갔으며,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에만 치우치게 되었다.
 
선종(禪宗)은 바로 이러한 교종의 폐단에 대해 반발하면서 이를 극복하고자 일어난 불교계의 새로운 경향이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교종과는 달리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하여 경전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복잡한 교리(敎理)를 떠나서 심성(心性)을 도야하는데 치중하였다. 말하자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 원래부터 자리 잡고 있던 불성(佛性)을 깨닫는 것이 바로 불교의 도리를 깨닫는 것[見性悟道 또는 見性成佛]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선종에서는 이를 위한 방법으로 선(禪) 즉, 마음을 한 곳에 모아 고요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제시하였다. 선을 통하여 각자의 마음속에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있는 불성을 깨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선종은 개인주의적 경향을 띨 수밖에 없었다.
 
선종이 신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7세기 선덕여왕(善德女王, 632~647) 때로 알려져 있지만, 그 당시에는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9세기 초 헌덕왕(憲德王, 809~826) 때 도의(道義)가 가지산문(迦智山門; 전남 장흥 보림사)를 개창하면서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홍척(洪陟)의 실상산문(實相山門; 전북 남원 실상사), 혜철(惠哲)의 동리산문(桐裏山門; 전남 곡성 태안사), 현욱(玄昱)의 봉림산문(鳳林山門; 경남 창원 봉림사), 도윤(道允)의 사자산문(獅子山門; 강원 영월 흥녕사, 지금은 법흥사), 범일(梵日)의 사굴산문(闍崛山門; 강원 강릉 굴산사), 낭혜(郎慧; 無染)의 성주산문(聖住山門; 충남 보령 성주사), 도헌(道憲)의 희양산문(曦陽山門; 경북 문경 봉암사), 이엄(利嚴)의 수미산문(須彌山門; 황해도 해주 광조사) 등 이른바 9산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선종 9산 본문 이미지 1가지산문동리산문실상산문봉림산문희양산문성주산문사자산문사굴산문수미산문흥녕사(법흥사)봉암사태안사보림사봉림사실상사
 
신라 중대(中代)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던 선종이 하대(下代)에 이르러 유행하게 된 것은 호족(豪族)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선종 9산은 대부분 호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면 사굴산문은 명주(溟州; 강릉) 호족 왕순식(王順式; 이전에는 金順式)의 후원을 받았고, 봉림산문은 김해의 호족 김율희(金律熙; 이전에는 蘇律熙)의 후원을 받았으며, 수미산문은 송악(松岳; 개성) 호족 왕건(王建)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선종 9산을 개창한 승려들도 호족 출신이 많았다. 비록 선조가 중앙의 귀족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들 자신은 이미 낙향하여 호족화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므로 교종이 금성(金城; 경주)을 중심으로 번창했던 것과는 달리 선종 9산은 대부분 그들을 후원하는 유력한 호족의 근거지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요컨대 선종은 호족의 종교로서 성장하였다. 선종의 개인주의적 경향은 진골 중심의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에 반발하여 일어난 호족들에게 독립할 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교종은 경전(經典)이라는 기성의 권위를 강조함으로써 현실에서의 골품제도가 가지는 권위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거기에 반해 선종은 경전이라는 기성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호족들이 골품제도라는 기존의 권위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하고 자립할 수 있다는 현실적 근거를 제공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