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최치원

[ 崔致遠 ]

요약 9세기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이다. 중국 당 나라에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신라로 돌아온 뒤에는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려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유교(儒敎)ㆍ불교(佛敎)ㆍ도교(道敎)에 모두 이해가 깊었고, 유ㆍ불ㆍ선 통합 사상을 제시하였다. 수많은 시문(詩文)을 남겨 한문학의 발달에도 기여하였다.
지산재

지산재

출생-사망 857 ~ ?
본관 경주(慶州)
고운(孤雲)·해운(海雲)
국적 신라
활동분야 문학,정치,철학
주요저서 《계원필경(桂苑筆耕)》《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시대 삼국시대

자(字)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또는 해부(海夫)이다. 고려 현종(顯宗) 때인 1023년(현종 14년)에 내사령(內史令)으로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되며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신라 6부의 하나인 ‘사량부(沙梁部, 지금의 경주)’에서 6두품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오늘날 경주(慶州) 최씨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본피부(本彼部)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 47대 헌안왕(憲安王, 재위 857~861) 원년인 857년에 태어났으며, 부친은 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 때에 숭복사(崇福寺) 창건에 참여했다고 전해지는 견일(肩逸)이다. 48대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 때인 868년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唐) 나라로 유학을 떠나, 874년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2년 동안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뤄양[洛陽] 등지를 떠돌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여 5수(首) 1권(卷)으로 된 <사시금체부(私試今體賦)>, 100수 1권으로 된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30수 1권으로 된 <잡시부(雜詩賦)> 등의 시문집을 지었으나,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 뒤 876년 선주(宣州) 율수현(溧水縣, 지금의 江蘇省 南京市) 현위(縣尉)로 관직에 올랐으며, 이 무렵 1부(部) 5권으로 된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을 저술하였다.

당시 당(唐)은 심각한 기근으로 인해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 875년부터는 왕선지(王仙芝), 황소(黃巢) 등이 유민을 모아 산둥성[山東省], 허난성[河南省], 안후이성[安徽省] 등지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877년 겨울 관직에서 물러난 최치원은 양양(襄陽)에서 이위(李蔚)의 문객(門客)이 되었다가,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그리고 고변이 황소(黃巢)의 반군을 토벌하기 위한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자, 그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4년 동안 표(表)·서계(書啓)·격문(檄文) 등의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이 무렵 최치원이 쓴 글은 1만여 편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특히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명문(名文)으로 이름이 높았다. 최치원은 879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 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의 직위에 올랐으며, 포상으로 비은어대(緋銀魚袋)를 받았다. 그리고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았다. 최치원(崔致遠)은 당 나라에서 17년 동안 머무르며 나은(羅隱, 833~909) 등의 문인들과 친교를 맺으며 문명(文名)을 떨쳤다.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도 <사륙집(四六集)>과 <계원필경(桂苑筆耕)> 등 그가 저술한 책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885년(헌강왕 11년), 최치원은 당 희종(僖宗, 재위 873~888)의 조서를 가지고 신라로 귀국했으며, 신라의 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은 그를 당에 보내는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는 시독(侍讀) 겸 한림학사(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으로 등용하였다. 귀국한 이듬해에 왕의 명령으로 ‘대숭복사비문(大崇福寺碑文)’ 등을 썼고, 당 나라에서 썼던 글들을 28권의 문집으로 정리하여 왕에게 바쳤다. 이 가운데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등 8권은 전해지지 않으며,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만 전해지고 있다. 886년 헌강왕이 죽은 뒤에는 외직(外職)으로 물러나 태산군(太山郡,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태인), 천령군(天嶺郡,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 부성군(富城郡,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의 태수(太守)를 지냈다. 893년에는 견당사(遣唐使)로 임명되었으나,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떠나지 못했다.

당시 신라는 지방에서 호족의 세력이 커지면서 왕실과 조정의 권위가 약화되었으며, 중앙 정부는 주(州)와 군(郡)에서 공부(貢賦)도 제대로 거두지 못해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겪고 있었다. 게다가 889년에는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이 공부(貢賦)의 납부를 독촉하면서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조정의 힘은 수도인 서라벌 부근에만 한정될 정도로 정치적 위기가 심화되었다. 최치원은 894년 진성여왕에게 10여 조의 시무책(時務策)을 제시하였고, 진성여왕은 그를 6두품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阿飡)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최치원의 개혁은 중앙 귀족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다.

진성여왕이 물러나고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2)이 즉위한 뒤, 최치원은 관직에서 물러나 각지를 유랑하였다. 그리고 만년에는 가야산(伽倻山)의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렀다.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쓸 때까지는 생존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지만,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때문에 정확한 사망 날짜는 확인되지 않으며, 방랑하다가 죽었다거나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는 경주의 남산(南山), 합천 매화산의 청량사(淸凉寺), 하동의 쌍계사(雙磎寺) 등을 즐겨 찾았던 것으로 전해지며, 부산의 해운대(海雲臺)라는 지명도 최치원의 자(字)인 ‘해운(海雲)’에서 비롯되었다.

유(儒)·불(佛)·선(仙) 통합 사상

최치원은 개혁이 좌절된 뒤에 신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은둔 생활로 삶을 마쳤다. 하지만 유교(儒敎) 정치이념을 기반으로 골품제도라는 신분제의 사회적 문제를 극복하려고 했던 그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최언위(崔彦撝), 최승로(崔承老) 등은 고려에서 유교 정치이념이 확립되는 데 기여했으며, 새로운 국가체제와 사회질서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때문에 최치원은 조선시대에 와서도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永平)의 고운영당(孤雲影堂) 등에 제향(祭享)되는 등 유학자들에게 계속해서 숭앙되었다. 그는 유교사관(儒敎史觀)에 입각해 역사를 정리하여 삼국의 역사를 연표의 형식으로 정리한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치원은 유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신라의 고유 사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나아가 유교·불교·도교의 가르침을 하나로 통합해서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난랑(鸞郞)’이라는 화랑을 기리는 ‘난랑비서(鸞郞碑序)’라는 글에서 유교와 도교, 불교를 포용하고 조화시키는 ‘풍류도’를 한국 사상의 고유한 전통으로 제시하고 있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國有玄妙之道曰風流). 그 가르침을 베푼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는데, 실로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設敎之源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들어와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다(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다(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악한 일은 하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진흥왕 조(條)’에 인용되어 전해지는 이 글에서 최치원이 말하는 풍류도는 신라의 화랑도를 가리킨다. 달리 풍월도(風月道)라고도 하는 화랑도는 신라 진흥왕 때에 비로소 제도로 정착되었지만, 그 기원은 고대의 전통 신앙과 사상으로 이어진다. <삼국사기>에는 화랑도에 대해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혹은 서로 도의를 연마하고 혹은 서로 가락을 즐기면서 산수를 찾아다니며 즐겼는데 멀어서 못간 곳이 없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고 그 중에서 좋은 사람을 가려 뽑아 이를 조정에 추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화랑의 수양 방법은 노래와 춤을 즐기고, 산악을 숭배하던 고대의 제천 행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고구려에도 ‘조의선인(皁衣仙人)’이라는 관직과 ‘경당(扃堂)’이라는 교육기관이 있었던 것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전통은 꼭 신라에만 국한되었던 것으로 보기 어렵다. 최치원은 이처럼 고유 신앙과 사상에 바탕을 두면서 유교·불교·도교 등 외래 사상의 가르침을 융합하고 있는 풍류도를 ‘현묘한 도(玄妙之道)’라고 칭하며, 포용과 조화의 특성을 지닌 한국 사상의 고유한 전통으로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최치원은 유교·불교·도교의 가르침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지극한 도(道)에서는 하나로 통하므로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진감선사 비문(眞鑑禪師碑文)’에 실린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학자들이 간혹 이르기를 석가와 공자의 가르침이 흐름이 갈리고 체제가 달라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것처럼 서로 모순되어 한 귀퉁이에만 집착한다고 한다. 하지만 시(詩)를 해설하는 사람이 문(文)으로 사(辭)를 해치지 않고, 사(辭)로 뜻(志)을 해치지 않는 것처럼,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말이 어찌 한 갈래뿐이겠는가. 무릇 제각기 마땅한 바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이 논(論)을 지어서 ‘여래(如來)가 주공, 공자와 드러낸 이치는 비록 다르지만 돌아가는 바는 한 길이며 지극한 이치에 통달하였다. 겸하지 못하는 자는 물(物)이 겸하기를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심약(沈約)도 말하기를 ‘공자는 그 실마리를 일으켰고 석가는 그 이치를 밝혔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 큰 뜻을 아는 사람이어야 비로소 더불어 지극한 도(道)를 말할 수 있다 하겠다.”

이처럼 궁극적으로는 유(儒)·불(佛)·선(仙)의 가르침이 하나로 통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최치원은 유학자이면서도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고, 노장사상(老莊思想)과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등에도 상당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승려들과 폭넓게 교류하고, 불교에 관한 글을 많이 남겼다. 여기에는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석순응전(釋順應傳)’·‘석이정전(釋利貞傳)’ 등 화엄종(華嚴宗)과 관련된 것들도 있지만, 지증(智證)·낭혜(朗慧)·진감(眞鑑) 등 새로 등장한 선종(禪宗) 승려들에 관한 글들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지증대사 비문(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 선종(禪宗)의 역사를 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원측(圓測)과 태현(太賢)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어 유식학(唯識學)에 대해서도 깊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교·불교·도교의 가르침을 모두 깊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글에서는 승려의 비문(碑文)에서도 불교만이 아니라 유교와 도교의 경전이 폭넓게 인용되고 있다. 이는 그가 유(儒)·불(佛)·선(仙)의 3교(敎)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은 달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상적 영향과 주요 저술

최치원의 유·불·선 통합 사상은 고려 시대의 유학과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교 정치이념을 강조한 최승로(崔承老)와 같은 유학자조차도 ‘불교는 수신(修身)의 근본이고 유교는 치국(治國)의 근원’이라고 말할 정도로 고려 시대에는 유교·불교·도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특히 민간 신앙과 풍습에서는 그것들이 서로 긴밀히 융합하는 모습을 띠었다. 그리고 고려 말기의 선승(禪僧)인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은 “이름을 들어보면 유교와 불교가 서로 멀어 다른 것 같지만 그 실상을 알면 유교와 불교가 다르지 않다.(認其名則佛儒逈異 知其實則儒佛無殊)”며 ‘유불일치설(儒佛一致說)’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조선 말기에 민족의 고유의 경천(敬天) 사상을 바탕으로 유·불·선의 사상을 융합하여 형성된 동학(東學)에서도 최치원 사상과의 연관성이 나타난다.

최치원은 문학에서도 뛰어난 성취를 보여 후대에 숭앙되었다. <사시금체부(私試今體賦)>,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잡시부(雜詩賦)>, <사륙집(四六集)> 등의 시문집은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고 이름만 남아 있지만, <계원필경(桂苑筆耕)>과 <동문선(東文選)>에는 그가 쓴 시문(詩文)들이 다수 전해지고 있다. 또한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光塔碑)’ 등 이른바 ‘사산비문(四山碑文)’과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도 전해지고 있다. 그는 대구(對句)로 이루어진 4·6 변려문(騈儷文)을 즐겨 썼으며, 문장이 평이하면서도 고아(高雅)한 품격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밖에도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 <중산복궤집(中山覆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 <석이정전(釋利貞傳)> 등의 저술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글씨도 잘 썼으며, ‘사산비문(四山碑文)’ 가운데 하동의 쌍계사에 있는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는 최치원이 직접 짓고 쓴 것으로 오늘날까지 그의 필적을 전해준다. 이 탑비(塔碑)는 대한민국 국보 47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최치원이 해서체(楷書體)로 쓴 비문은 모두 38행 2,414자로 되어 있다.

최치원 연보
출생 857~ 사망 ?

857

견일의 아들로 출생.

868

당나라에서 유학.

874

당나라 빈공과에 합격.

876

선주 율수현 현위로 관직에 오름.

877

관직에서 물러나 양양에서 이위의 문객으로 지냄.

885

희종의 조서를 가지고 신라에 귀국.

886

당나라에서 썼던 글들을 문집으로 정리하여 신라 왕에게 바침.

893

견당사로 임명되었으나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 때문에 관직에 나가지 못함.

894

진성여왕에게 10여 조의 시무책을 제시하여 아찬으로 임명 됨.

897

효공왕이 즉위한 뒤 관직에서 물러나 각지를 유랑.

908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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