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문왕

경문왕

[ 景文王 ]

요약 신라의 제48대 왕(재위 861∼875).
출생-사망 846 ~ 875
국적/왕조 신라
재위기간 861년∼875년
본명 김응렴
시대 남북국시대
활동분야 정치

성은 김(金), 이름은 응렴(膺廉/凝廉)이며 시호는 경문(景文)이다. 신라의 제43대 희강왕(僖康王, 재위 836∼838)의 손자로 아버지는 아찬(阿湌) 김계명(金啓明)이다. 어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 박씨(朴氏)로 광의부인(光義夫人)이라고도 한다.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재위 857∼861)의 두 딸을 모두 왕비로 맞이해 김정(金晸, 제49대 헌강왕), 김황(金晃, 제50대 정강왕), 김만(金曼, 제51대 진성여왕) 등을 낳았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어머니인 광화부인이 신무왕의 딸이며, 왕비는 헌안왕의 딸인 문자왕후(文資王后)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삼국사기》에는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弓裔, ?∼918)가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도 있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869년(경문왕 9) 왕자 김윤(金胤)을 당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신라에서는 당나라로 사신이나 숙위(宿衛)로 보낸 왕족들에게도 왕자라는 호칭을 사용했으므로 김윤이 경문왕의 왕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경문왕은 860년(헌안왕 4) 15세의 나이로 헌안왕의 맏딸인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와 결혼했다. 《삼국사기》에는 당시 헌안왕이 임해전(臨海殿)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공부하고 돌아온 경문왕에게 선인(善人)에 관해 질문을 하고는 그의 답변에 탄복해 사위로 삼기로 결심하고 20살인 맏딸과 19세인 둘째딸 가운데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고르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맏딸보다 둘째딸의 외모가 나았으므로 경문왕의 부모는 둘째딸과 결혼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나, 흥륜사(興輪寺)의 중은 맏딸과 결혼하면 3가지 이익이 있고 둘째딸과 결혼하면 3가지 손해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결국 경문왕은 왕의 뜻에 따르겠다고 하여 맏딸과 결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으나, 여기에서는 흥륜사의 중이 아니라 낭도(郎徒) 가운데 하나인 범교사(範敎師)라는 인물의 권유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경문왕이 18세에 국선(國仙)이 되었으며, 20세인 약관(弱冠)의 나이에 헌안왕의 사위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문왕은 861년(헌안왕 5) 정월에 헌안왕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헌안왕은 죽기 전에 사위인 경문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왕위에 오른 경문왕은 862년(경문왕 2) 이찬 김정(金正)을 상대등(上大等), 아찬 위진(魏珍)을 시중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863년(경문왕 3)에는 왕비 영화부인의 동생을 둘째왕비로 삼았다. 《삼국사기》에는 당시 경문왕이 앞서 맏딸과 결혼하라고 권유했던 흥륜사의 중에게 당시 말했던 3가지 이익이 무엇인가를 묻자 헌안왕의 뜻에 부합해 왕의 총애를 받게 되는 것이 첫째 이익이고, 그 때문에 왕위를 잇게 된 것이 둘째 이익이며, 이로써 마음에 두고 있던 둘째딸도 얻게 된 것이 셋째 이익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866년(경문왕 6)에는 부친인 김계명을 의공대왕(懿恭大王), 모친인 광화부인을 광의왕태후(光懿王太后)로 봉했다. 그리고 부인 김씨를 문의왕비(文懿王妃), 맏아들인 김정을 태자로 삼았다. 874년(경문왕 14)에는 상대등 김정이 죽자 시중인 위진을 상대등으로 삼고, 인흥(藺興)을 새로 시중으로 임명했다.

경문왕은 잇따른 내분으로 약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863년 음력 2월에는 국학(國學)으로 행차하여 학자들로 하여금 경서를 강론하게 하고 포상을 하였다. 864년(경문왕 4)에는 직접 감은사(感恩寺)로 가서 바다를 향해 제사를 지냈고, 866년 음력 정월 15일에는 황룡사(皇龍寺)에서 연등행사를 보고 백관들을 위해 연회를 열었다. 868년(경문왕 8) 황룡사탑이 벼락을 맞아 파손되자 871년(경문왕 11)에 이를 고쳐쌓기 시작해 873년(경문왕 13)에 9층 22장(丈)의 높이로 완공했다. 오랜 내분의 과정에서 훼손된 궁궐의 정비에도 힘을 기울여 임해전(臨海殿, 867년), 조원전(朝元殿, 868년), 월상루(月上樓, 871년), 월정당(月正堂, 874년) 등을 잇달아 중수했다.

그러나 경문왕 때에도 정치적 불안정은 계속되었다. 866년(경문왕 6)에는 이찬 윤흥(允興)이 아우인 숙흥(叔興)·계흥(季興)과 함께 반란을 꾀하다가 발각되자 대산군(岱山郡)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경문왕은 그들과 일족을 모두 붙잡아 처형했다. 868년(경문왕 8)에는 이찬 김예(金銳)와 김현(金鉉) 등이 반란을 꾀하다 처형되었고, 874년에는 이찬 근종(近宗)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로 쳐들어왔다. 경문왕은 이들을 물리치고 근종과 그의 무리들을 수레에 묶어 찢어 죽였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거열형(車裂刑)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으로 전해진다.

《삼국사기》에는 경문왕 때에도 신라에 자연재해가 자주 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863년(경문왕 3)에는 겨울에도 날씨가 포근해 음력 10월에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고, 11월에도 눈이 내리지 않았다. 867년(경문왕 7)에는 금성에 전염병이 퍼졌으며, 홍수로 농작물의 피해가 컸다. 경문왕은 각지로 사신을 보내 백성들을 위로했다. 870년(경문왕 10)에는 금성에 지진이 일어났으며 가을에도 큰 비가 내려 홍수가 났다. 겨울에는 전염병이 창궐했다. 872년(경문왕 12)에도 금성에 지진이 일어났으며, 가을에는 각지에 메뚜기 떼가 창궐해 농작물의 피해가 컸다. 그래서 겨우내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전염병도 창궐해 경문왕은 각지로 사신을 보내 백성들을 구제했다. 875년(경문왕 15)에도 금성의 동쪽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경문왕 때에도 신라는 당나라와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했으며, 일본과도 교류하였다. 862년(경문왕 2) 경문왕은 아찬 부량(富良) 등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냈으나 이들은 도중에 익사하였다. 864년(경문왕 4)에는 일본에서 신라로 사신을 보내왔으며, 865년(경문왕 5)에는 당나라 의종(懿宗, 재위 859∼873)이 호귀후(胡歸厚)와 배광(裴光) 등을 사신으로 보내 헌안왕의 죽음을 조문하고 부의품을 전해왔다. 경문왕은 이듬해 소판(蘇判) 김윤(金胤)을 사은사로 보내 답례를 했으며, 이동(李同) 등 3인도 유학생으로 함께 보냈다. 870년(경문왕 10)에는 사찬(沙湌) 김인(金因)을 숙위로 보냈으며, 874년(경문왕 14)에는 당나라 희종(僖宗, 재위 873∼ 888)이 사신을 보내왔다. 이 해에는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서 장원으로 급제하기도 했다.

경문왕은 875년(경문왕 15) 음력 7월 8일에 죽었다. 장례에 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왕릉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경문왕이 죽은 뒤에는 태자인 김정이 제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으로 왕위를 이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경문왕의 침전(寢殿)에 밤마다 뱀들이 몰려들었고, 궁인들이 이를 쫓아내려하자 경문왕이 뱀들이 없으면 편히 잘 수 없다며 이를 말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경문왕이 잘 때에는 뱀들이 혀를 날름대며 가슴을 온통 덮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경문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 갑자기 귀가 당나귀의 귀처럼 길어졌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두건을 만드는 복두장(幞頭匠) 한 사람만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그는 평생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있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도림사(道林寺)의 대나무 숲에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다. 그 뒤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 숲에서 그 소리가 들려왔고, 경문왕은 대나무를 모두 베어 버리고 산수유나무를 심었다. 그러자 “임금님 귀는 길다”는 소리만 났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경문왕 때에 현금포곡(玄琴抱曲)과 대도곡(大道曲), 문군곡(問群曲)이라는 3곡의 노래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국선(國仙)인 요원랑(邀元郞), 예흔랑(譽昕郞), 계원(桂元), 숙종랑(叔宗郞) 등이 금강산 일대인 금란(金蘭)을 유람하며 임금을 도와 나라를 다스릴 뜻을 담아 3편의 시를 지어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보냈고, 대구화상이 이를 3곡의 노래로 완성해 경문왕 앞에서 연주해 상을 받았으나,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경문왕 본문 이미지 1 

만(진성여왕)황(정강왕)정(헌강왕)광화부인김계명

참조항목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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