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확립기

조선의 확립기

조선왕조의 확립기는 태조(太祖)∼9대 성종(成宗)까지를 말한다. 태조의 치세는 이른바 창업기(創業期)로서, 국호를 정하고 도읍을 옮기며, 정치이념을 내세우고 문물제도를 정비함에 주력하였다. 이때에는 건국에 협조한 개국공신(開國功臣)이 실권을 장악하고 제도정비를 주도하였는데, 특히 조준은 전제개혁을 주관하여 새 왕조의 경제안정에 기여하였고,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경제문감(經濟文鑑)》을 편찬하여 통치이념의 방향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개국공신들의 세력 증대는 왕실과 알력을 빚었고, 두 차례에 걸쳐 왕자의 난이 일어나, 방원이 태종으로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하륜(河崙) ·권근(權近)의 도움을 받아 왕권중심으로 권력구조를 바꾸고, 관제를 개편하여 관료제도를 정비하였다. 양전사업(量田事業)을 강화하고 사원경제(寺院經濟)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여 국가의 재정기반을 굳혔으며, 조세 ·신분 ·호적제도를 개혁하여 양인(良人)을 늘리고 국역(國役)기반을 확대하였다. 사병혁파(私兵革罷), 신문고 설치, 사섬서(司贍署) 설치, 계미자(癸未字) 주조, 호패법(號牌法) 실시, 서얼차대(庶孽差待) 등은 이때에 이루어졌다.

태종 때에 다져진 정치 ·경제 ·군사적 안정을 바탕으로 세종 때에는 문화의 융성기를 맞았다. 세종은 모범적인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구현하고자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유관(柳寬) 등과 같은 청렴하고 노련한 재상을 등용하여 민의(民意)에 부합된 정치를 하였다. 아울러 집현전을 학술기관으로 확장하여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등의 젊고 재주 있는 학자들로 하여금 고금의 문물제도를 깊이 연구하게 하여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게 하였으며, 한글을 창제하여 민족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국민복지 향상에도 유의하여 조세 ·형벌 ·의료제도를 개선하고, 의창(義倉)제도를 실시하였으며, 측우기(測雨器)를 비롯한 각종 과학기계를 발명하였고, 아악(雅樂)을 정리하였다. 활자개량에도 힘써 많은 책을 간행하였는데, 《고려사(高麗史)》 《농사직설(農事直說)》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의방유취(醫方類聚)》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은 이때에 펴낸 것들이다.

세종은 또한 국토확장에도 힘을 기울여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동북지방을 개척하여 6진(六鎭)을 설치하게 하였고, 최윤덕(崔潤德)으로 하여금 서북지방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4군(四郡)을 설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왜구의 본거지인 쓰시마섬[對馬島]을 정벌하고, 3포(三浦)를 열어 일본과의 제한된 무역을 하였다.

세종의 뒤를 이어 문종 ·단종이 즉위하였으나, 병약하고 연소하여 김종서 등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왕권이 약화되었다. 이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은 한명회(韓明澮) ·양성지(梁誠之) 등의 협조를 얻어 무력으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세조(世祖)이다. 세조는 즉위하면서 단종의 복위를 꾀한 사육신(死六臣) 등을 제거하고 동북지방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반란을 진압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어 부국강병책을 강력히 추진하여 국력을 키우는 데 힘썼으며, 직전법(職田法)을 실시하여 국가수입을 늘렸고, 조직적이며 통일된 법전의 마련을 위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에 착수하는 한편, 민심을 수렴하고자 배불정책을 완화하여 원각사(圓覺寺)를 건조하고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불경을 간행하였다.

조선의 문물제도는 성종 때에 완성되었다. 성종은 특히, 유학을 장려하여 홍문관(弘文館) ·독서당(讀書堂)을 설치하고, 서거정(徐居正) 등의 보필을 받아 《동국통감(東國通鑑)》을 비롯한 여러 서적을 편찬하였으며, 《경국대전》을 완성, 국가제도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농업을 장려하여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김종직(金宗直)을 중심으로 한 영남의 사림을 등용하며 훈구(勳舊) 세력의 강화를 견제하면서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은 건국 이후 1세기에 걸쳐 집권체제를 위한 정비작업을 일단락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