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덕

최윤덕

[ 崔潤德 ]

요약 조선 전기의 무신. 대마도 정벌과 4군 설치, 읍성 축조 등 조선 전기 국방 체계의 강화에 큰 공을 세웠다.
정열공최윤덕장상신도비

정열공최윤덕장상신도비

출생-사망 1376 ~ 1445
본관 통천(通川)
백수(伯修) ·여화(汝和)
임곡(霖谷)
시호 정렬(貞烈)
국적 조선
활동분야 군사
출생지 경남 창원
주요업적 대마도 정벌, 읍성 축조, 4군 설치
시대 조선시대(세종)

1376년(고려 우왕 2년) 경남 창원에서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를 지낸 (崔雲海)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최운해는 이성계와 함께 에 참여해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던 인물이다.

최윤덕은 1394년(태조 3) 무과 회시(會試)에 급제하였으나 아버지를 따라 서북면 수비에 나서는 바람에 전시(殿試)에 응시하지 못했다. 1396년(태조 5) 영해(寧海,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에서 왜구 격퇴에 공을 세웠다. 그때의 공으로 1400년 (太宗)이 그를 직접 불러 훈련관 부사직으로 삼았다. 1402년 최윤덕은 호군(護軍)으로 승진했다. 또한 회시에 합격하고도 전시에 응시하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여 왕의 명령으로 특별히 무과 복시(覆試) 급제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1403년에는 대호군(大護軍)으로 승진했다. 1404년 부친의 사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상중에도 관직을 수행하게 하는 기복(起復) 명령을 받아 1406년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로 임명되었다.

1410년(태종 10)에 여진족이 세력을 확대하자 조전 지병마사(助戰知兵馬使)로 파견되었으며, 이듬해까지 경성 병마사(鏡城兵馬使)·경성 절제사(鏡城節制使) 등을 역임하며 동북면 방어에 큰 공을 세웠다. 1411년에는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1412년에는 중군 절제사(中軍節制使), 1415년에는 우군 총제(右軍摠制)로 임명되었다.

1418년 (世宗)이 즉위한 후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가 되었고, 이듬해인 1419년에는 의정부 참찬(參贊)이 되었다. 왜구의 약탈이 기승을 부리자 곧바로 상왕(上王)으로 물러난 태종으로부터 삼군 도절제사(三軍都節制使)로 임명되어 (李從茂) 등과 함께 섬을 정벌하였다. 1421년(세종 3)에는 공조판서로 임명되었고,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이듬해에 돌아왔다. 1423년에 평안도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가 되어 2년 동안 서북면으로 파견되었다가 1425년에 다시 의정부 참찬으로 복귀하였다. 그 뒤 판좌군부사(判左軍府事)를 거쳐 1428년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도순무사(都巡撫使)로서 충청·전라·경상도 지역을 순시하며 왜구 방어를 위한 읍성 축조 계획을 세워 조정에 건의하였으며, 1430년에는 판중군 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로 임명된 뒤 도순문사로 다시 파견되어 경상도의 연일(延日)·곤남(昆南)·합포(蛤浦), 전라도의 임피(臨陂)·무안(務安)·순천(順天), 충청도의 비인(庇仁)·보령(保寧) 등에 읍성(邑城)을 쌓았다.

1432년 겨울에 파저강(婆猪江) 유역에 살던 이만주(李滿住, 1407∼1467) 휘하의 건주여진이 국경을 넘어 침략해오자 평안도 절제사로 파견되어 이를 토벌하였다. 그리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433년(세종 15) 우의정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여진족이 다시 침략해오자 평안도 도안무찰리사(都安撫察理使)가 되어 다시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이때 정승의 지위를 지닌 채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서는 것이 맞지 않다며 우의정의 자리에서 물러나길 원했으나 이는 수용되지 않았다. 1435년(세종 17) 최윤덕은 계속해서 평안도 도안무찰리사로 파견되어 있으면서 으로 임명되었다. 이때에도 병을 이유로 사직을 하였으나 이 역시 수용되지 않았다. 이듬해에는 삼군도총제부를 대신해서 설치된 중추원의 최고직위인 정일품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로 임명되었다.

조선의 국방 체제를 견고히 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곳곳에 읍성을 축조하고 각 도의 병기 체계를 정비하는 등 왜구의 침략에 꾸준히 대비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북방에 대해서도 여연(閭延)·자성(慈城) 등에 보와 성곽을 축조하고, 평안도와 함경도에 토관제도(土官制度) 실시를 건의하는 등 국방 체계의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의 건의로 4군과 6진이 설치되어 세종 대에 이르러 조선의 영토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확정되었다.

최윤덕은 1444년(세종 26)에 관직에서 물러나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다시 영중추원사로 임명되었다. 세종은 1445년(세종 27) 음력 11월에 그의 공적을 치하하여 안석(案席, 앉아서 몸을 뒤로 기대는 데 사용하는 방석)과 지팡이를 그에게 선물로 보냈다. 그러나 최윤덕은 병이 깊어져 그해 음력 12월 5일에 사망했다. 세종은 최윤덕이 죽은 후 ‘정렬(貞烈)’의 시호를 주었으며,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리고 1451년 세종이 죽은 뒤에 최윤덕은 허조(許稠), 신개(申槩), 이수(李隨)와 함께 세종의 묘정(廟庭)에 함께 배향되었다.

최윤덕은 무신으로서 정승의 자리에 올라 ‘장상(將相)’으로 불리며 후대에도 높이 평가되었다. 그래서 1707년(숙종 33)에 숙종은 평안도 안주(安州)에 최윤덕과 을지문덕 등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짓고 ‘청천사(淸川祠)’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하였다. 최윤덕의 묘소는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대산리에 있으며, 1992년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창원시 의창구 북면 내곡리에 위치한 최윤덕의 생가 터는 1995년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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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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