캉유웨이

캉유웨이

[ 康有爲 ]

요약 중국 청나라 말기 및 중화민국 초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무술변법(戊戌變法)이라 불리는 개혁의 중심적 지도자이다. 고향에 사숙을 열고 량치차오 등을 교육하였으며 베이징·상하이에 면학회(勉學會)를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시작하여 '변법자강책(變法自彊策)'으로 개혁을 지도하였다.
출생-사망 1858.3.19 ~ 1927.3.31
광하(廣夏)
장소(長素)
별칭 별명 조이
국적 중국
활동분야 사상, 정치
출생지 중국 광둥성 난하이현[南海縣]
주요저서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자 광하(廣夏). 호 장소(長素). 별명 조이(祖詒). 광둥성 난하이현[南海縣] 출생. 무술변법(戊戌變法)의 중심적 지도자이다. 전통적인 유교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는 공양학(公羊學)을 배우고 널리 유럽의 근대사정도 익혔다. 그 무렵에 격렬해진 열강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하여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본따서, 중국에도 국회를 열고 헌법을 정하여 입헌군주제로 하는 정치적 개혁[變法自疆]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는 고향에 사숙(私塾) 만목초당(萬木草堂)을 열고 량치차오[梁啓超] 등을 교육하는 한편, 황제에의 상서(上書)와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에서 면학회(勉學會)를 조직하는 등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1898년 그의 ‘변법자강책(變法自彊策)’은 제사(帝師)인 옹동화(翁同龢 )를 통하여 광서제(光緖帝)에 받아들여져 무술변법이라 불리는 개혁을 지도하였다.

과거(科擧)의 개정, 실업의 장려, 부정관리의 정리 등, 그 내용은 시대의 조류에 알맞은 것이었으나 개혁의 추진력이 궁정 내의 일부에 한정되었고, 국민들과의 광범한 유대가 없었기 때문에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100일변법’이라 불리고 있듯이 불과 100일쯤 뒤에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배반으로 실패로 끝나고, 서태후(西太后) 등의 수구파(守舊派)가 모든 것을 원상대로 환원시키자 캉유웨이 등은 해외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보황회(保皇會)를 설립하여 의화단(義和團)의 난을 틈타 선통제(宣統帝)의 복위를 꾀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사상은 차차 쇠퇴하여 쑨원[孫文] 등의 혁명파에 의하여 대체되었다.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대동서(大同書)》 등 많은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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