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학파
[ 碑學派 ]
- 요약
비각(碑刻)을 바탕으로 서법(書法)을 배우는 학파.
이에 대해 법첩(法帖)에 의해 서법을 배우는 학파를 첩학파(帖學派)라 부른다.
청(淸)나라가 되면서 금석학(金石學)이 활발해지자 이에 따라 비(碑)를 배우는
서예가들이 점차 증가하였고, 청나라 중엽에는 등석여(鄧石如)가 나와
전예체(篆隸體)를 잘 다듬어 복고적 서풍을 수립하였다. 때마침
완원(阮元:1764∼1849)이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 및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을 저술하여 북조(北朝)에서 유행하였던 북비(北碑)와
남조(南朝)에서 발달하였던 남첩(南帖)의 가부(可否)를 비판하여 북비가 남첩보다
바른 서체의 모습을 전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북조의 비각을 중시하는 경향이 생겼다.
원래 첩학파의 본지는 진(晉)나라의 왕희지(王羲之) ·왕헌지(王獻之) 이래의 전통을
이어받은 데 있으며 다소의 소장(消長)과 신구 서풍의 구별은 있었지만 거의 송 ·원
·명으로 이어지고 청나라 초에는 그 여풍(餘風)이 더욱 유행되었다. 청나라 말에
이르러 캉유웨이[康有爲]가 나와서 남북조의 비를 절찬하여 북비 중에서도 특히
북위(北魏)의 석각(石刻)을 최상의 것이라 칭송하여 첩학파에 대한 비학파의 입장을
가장 선명하게 세워놓았다. 이 영향은 근대의 금석학 발전과 병행하여 더 크게
확대되어 비학은 마침내 첩학을 압도, 오늘에 이른다. 건륭기(乾隆期:1735∼1795)
이후의 비학파로 등석여(鄧石如) ·이병수(伊秉綬) ·진홍수(陳鴻壽)
·포세신(包世臣) ·하소기(何紹基) ·오희재(吳熙載) 등이 있다. 한국에서는
김재로(金在魯)의 《금석록(金石錄)》과 김정희(金正喜)의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