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금석학

동양의 금석학

동양에서의 금석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동기 ·석옥류(石玉類) ·토기 ·갑골(甲骨) 등에 주각(鑄刻)되어 있는 것으로, 금속류와 석각(石刻)이 중심이 되어 있지만, 더욱 세분하여 금속류 ·전폐류(錢幣類) ·인새류(印璽類) ·석각류 ·옥류(玉類) ·도류(陶類)에 갑골류 ·죽간류(竹簡類)까지도 포함시키고 있다. 중국에서는 금석류(金石類)에 기사나 표지를 명시하여 그 문자를 금문석각(金文石刻) 또는 관지(款識)라 하고, 그 기물을 길금정석(吉金貞石)이라 하여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길금정석’이란 영구히 전승하여 보존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관(款)’은 음각, ‘지(識)’는 양각의 문자를 가리켰다. 이들은 금속류 ·석류 ·도류의 세 종류로 크게 나눌 수 있다.

⑴ 금속류:금속류에는 청동제의 이기(彛器) ·악기 ·무기 ·인새(印璽) ·전폐(錢幣) ·감경(鑑鏡) ·불상(佛像) ·범종(梵鐘) 등이 있다. 이기는 식기(食器) ·수기(水器) ·주기(酒器) 등, 은(殷) ·주(周) 시대의 고동기(古銅器)의 총칭으로, 예기(禮器)와 악기(樂器)를 합쳐 ‘예악기’라고도 한다. 그것들에는 많은 명문(銘文)이 있으며, 시대가 지남에 따라서 그 기형 ·명문 ·용도 ·의의 등이 변천하였다. 한(漢) ·위(魏) ·진(晋) 시대에는 복어기(服御器)로서 실용화된 것이 많았다. 은 ·주의 예기 중에는 기체(器體)에 새겨 있는 명문으로 그 이름이 판명된 것도 많다. 금속제 인새는 한나라의 유물이 많지만, 은나라의 것도 이미 알려지고 있다. 도포화전(刀布貨錢)도 춘추시대부터 사용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경제사에서뿐만이 아니라, 고전학(古錢學)의 대상이 되어 있다. 후한 때에는 연호명(年號銘)을 새겨넣은 것도 출현되고 있다.

이 밖에 권형도량(權衡度量)의 종류도 있으며, 불상 ·범종은 발견은 늦었지만, 중요성에 있어서는 다른 것에 떨어지지 않는다. ⑵ 석류(石類):석류는 석각(石刻)이라고도 하는데, 진(秦) ·한(漢) 시대 이후에 성행하였다. 각석(刻石) ·비(碑) ·묘지(墓誌) ·조상(造像) ·경전(經典) 등이 있다. ① 각석(刻石):기(記) ·송(頌) ·명(銘) ·찬(贊) ·조칙(詔勅) ·첩문(牒文) 등을 돌에 새겨넣은 각문으로, 갈(碣) ·입석(立石) ·마애(磨崖) 등이 있는데, 이는 석고문(石鼓文) ·진시황각석(秦始皇刻石) 등이다. ② 비(碑):본래 묘문(廟門)에 세웠던 것인데, 후에는 무덤의 가에 세워졌고, 후한시대에는 문자가 새겨져 비신(碑身) ·비두(碑頭) ·부좌(趺座) 등으로 형식이 고정되었다. 고인의 사적을 전하기 위한 묘비(墓碑) ·(神道碑)가 있고, 공적 ·덕정(德政), 기타 사묘(寺廟) ·학교 등의 건립이나 중수 또는 조상(造像) ·흥학(興學) 등의 사실을 기록한 기사비(記事碑)도 있다.

③ 묘지:묘지명(墓誌銘)이라고도 하며 방형(方形)의 돌에 고인의 사적을 각문하여 무덤 안에 매장하는 관습이 후한 때에 비롯되어 에 유행하였고, 거기에 또한 개석(蓋石)을 사용하게 되었다. ④ 조상(造像) ·화상(畵像):불상이나 인물 ·초목 ·조수(鳥獸)의 종류를 선각(線刻)이나 부조(浮彫)로 나타낸 것을 말하는데, 조상은 북위(北魏) ·수(隋) ·당(唐) 때에 성행하였고, 룽먼[龍門] 석굴은 특히 유명하다. 화상석은 후한시대와 삼국시대에 걸쳐 산둥[山東] ·허난[河南] ·쓰촨[四川] 등지에서 만든 것이 유명한데, 궁전 ·사당(祠堂) ·분묘의 벽면 등의 장식을 위하여 만들어졌다. 그 중 무씨석사(武氏石祠)의 것이 유명하다. 화상의 곁에 제자(題字)가 각문되어 있어 당시의 사상과 문물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 많다. ⑤ 경전(經典):선대(先代) 사람들의 저작품을 전하기 위하여 제작된 것이 경전석각(經典石刻)인데, 후한시대에 이르러 오경(五經)의 문자가 눈에 띄게 어지러워졌기 때문에 이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석경(石經)이 태학(太學)에 세워졌다.

한(漢)의 희평석경(喜平石經)이 최초로 된 것이며, 이 후로는 위(魏)의 정시석경(正始石經), 당나라의 개성석경(開成石經)이 유명하고, 새로운 것으로는 청(淸)시대의 건륭석경(乾隆石經)도 널리 알려진 것이다. 희평석경의 잔존된 것은 1923년 뤄양[洛陽]의 태학지에서 처음으로 출토되었다. 각문되어 있는 것은 《역경(易經)》 《노시(魯詩)》 《의례(儀禮)》 《공양전(公羊傳)》 《논어(論語)》 《상서(尙書)》 등이며, 서체(書體)는 예서(隸書)였다. 정시석경의 잔존된 것은 《상서》와 《좌전(左傳)》 을 각문한 것이며, 서체는 고문(古文) ·전서(篆書) ·예서의 3종이 사용되어 삼체석경(三體石經)이라고도 한다. 개성석경의 잔존된 것은 해서(楷書)로 조각되어 《역경》 《상서》 《모시(毛詩)》 《주례(周禮)》 《의례》 《예기》 《좌전》 《공양전》 《곡량전(穀梁傳)》 《효경(孝經)》 《논어》 《(爾雅)》 등이 새겨져 있다. 조상명(造像銘)으로는 윈강[雲崗] ·룽먼의 석불명이 유명하며, 그 외에 석불의 대좌에 공양자의 이름과 연월일을 새겨넣은 것이 있어 불상의 형식연대의 고증 자료가 되고 있다.

[敦煌]의 막고굴(莫高窟)에 있는 것도 일종의 조상명으로, 한자 ·몽골자 ·범자 ·티베트 문자 ·위구르 문자 ·서하문자로 조각되어 ‘지정(至正) 8년(1348)’이라 새겨져 있다. 불전(佛典) 석각은 마애(磨崖) ·비 ·당(幢) 등 여러 형식이 있지만, 허베이성[河北省] 팡산[房山]의 석경은 수나라에서 요(遼)나라까지 이르러 제작 연월일이 긴 것으로 유명하다. 당(唐)나라 때에는 도교비(道敎碑)도 각문되었다. 또한 서목(書目)이나 약방(藥方)을 조각한 것도 있고, 송나라 때 이후에는 법첩(法帖)의 복각(覆刻)도 행하여졌다. 이들 외에 계보(系譜) ·지계(地界) ·지도가 있으며, 《우적도(禹蹟圖)》 《화이도(華夷圖)》 《장안지도(長安志圖)》 《평강도(平江圖)》 등은 지리학 자료로서도 중요시되고 있다. 또한 명승고적에서의 제명, 돌다리 ·돌난간 등의 각문도 중요하다. ⑶ 도류(陶類):도기(陶器) ·토기(土器) ·와전(瓦塼), 기타 봉니(封泥) 등을 포함하는데, 토기에 문자를 파넣은 것의 예로는 제(齊) ·연(燕)의 고지(故地) 등에서 발견되었고, 인새(印璽)에 속해야 하는 봉니도 산둥[山東] ·서역(西域) ·낙랑(樂浪) 등에서 채집되었다.

중국의 금석학의 연구는 고대 육조(六朝) 때에 이미 싹텄음을 인정할 수가 있다. 《수서경적지(隋書經籍誌)》에 의하면, 양(梁)의 지제(之帝)가 고비(古碑)의 연구를 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안씨가훈(顔氏家訓)》에서 수나라 때에 진(秦)의 명문(銘文)의 고찰이 행하여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학문으로서 성립한 것은 송(宋)나라 때부터였다. 금석학의 창시자로는 북송의 구양 수(歐陽修) 및 그와 친교가 있던 유창(劉敞)이다. 구양 수는 금문(金文)이나 석각의 탁본(拓本)을 수집하여 해설한 《집고록발미(集古錄跋尾)》(10권)를 저술하였고, 유창은 《선진고기도(先秦古器圖)》를 저술하고 그 서문에서 “예(禮)의 전가(專家)는 기형(器形)에 의해서 예기의 제(制)를 분명히 밝히고, 문자학자는 명문(銘文)을 해독하며, 계보가(系譜家)는 각자의 가계시호(家系諡號)를 분명히 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이로 인해 기형학 ·문자학 ·역사학의 세 부문이 종합되는 금석학의 연구 태도가 잘 설명되어 있다고 하겠다.

또한 여대림(呂大臨)은 《고고도(考古圖)》(10권)를 저술하였는데, 이 저서는 동기 자체에 대한 관찰, 수장(收藏)의 과정, 명문의 해설, 기형에 의한 분류 및 시대 결정 등을 나타낸 것이었고, 휘종(徽宗)의 칙명에 의한 《선화박고도록(宣和博古圖錄)》(30권)도 그 체재를 배워서 기형학적 방면을 한층 더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나 석각 관계에서는 오히려 문자나 서법(書法) 부문이 더욱 중시되었다. 즉, 사전(史傳)의 오류를 보정(補正)하려는 입장을 구양 수에 이어서 증공(曾鞏)의 《원풍제발(元豊題跋)》, 진사(陳思)의 《보각총편(寶刻叢編)》에서 발전시켰으며, 문자적 연구에 관해서는 홍괄(洪适)의 《예석(隸釋)》 《예속(隸續)》과 유구(劉球)의 《예운(隸韻)》, 누기(婁機)의 《한예자원(漢隸字源)》 등이 저술되었고, 서법에 관해서는 주장문(朱長文)의 《묵지편(墨池編)》 등이 있다. 대표적 저작인 설상공(薛尙功)의 《역대종정이기관지법첩(歷代鐘鼎彛器款識法帖)》은 기형도(器形圖)가 생략되고 오직 명문모본(銘文模本)과 그 고석(考釋)만으로 되어 있으며, 법첩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처럼 문자 편중의 경향으로 된 것은 국도남천(國都南遷) 후에 금석(金石)의 실물에 접촉되는 기회가 적었다는 데에 큰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경향은 청나라 때에 가서도 똑같았으며, 《서청고감(西淸古鑑)》 《영수고감(寧壽古鑑)》 《서청속감(西淸續鑑)》 등의 도록(圖錄)이 건륭(乾隆) 시대에 칙선(勅選)되기는 하였지만, 청나라를 통하여 형태학적 성과는 아주 적었다. 이에 대하여 문자학 ·사학적 관계에서는 고염무(顧炎武)가 《금석문자기(金石文字記)》(6권)를 저술한 것을 비롯하여, 전점(錢坫) ·완원(阮元)의 《적고재종정이기관지(積古齋鐘鼎彛器款識)》는 설상공(薛尙功)의 학풍을 본떠 당시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청나라 때 발달한 고증학(考證學)의 융성에 발맞추어 금석문을 전승보전한 문헌과 비교하여 그같은 사실과 다른 사실을 정확히 밝힌 명저로서 전대흔(錢大昕)의 《잠연당금석발미(潛硏堂金石跋尾)》, 무억(武億)의 《수당금석문자발(授堂金石文字跋)》, 손성연(孫星衍)의 《평진관독비기(平津館讀碑記)》 등이 알려졌으며, 이 밖에 정요전(程瑤田)의 《고공창물소기(考工創物小記)》, 풍운붕(馮雲鵬)의 《금석색(金石索)》, 유희해(劉喜海)의 《장안획고편(長安獲古編)》, 유심원(劉心源)의 《기고실길금문술(奇觚室吉金文述)》 등이 잇달아 나왔고, 정돈(程敦)의 《진한와당문자(秦漢瓦當文字)》, 오대징의 《고옥도고(古玉圖攷)》, 육심원(陸心源)의 《고전도석(古專圖釋)》, 오식분(吳式芬)의 《봉니고략(封泥考略)》, 진개기(陳介祺)의 《보재장종(簠齋藏鐘)》, 단방(端方)의 《장석기(藏石記)》, 유철운(劉鐵雲)의 《철운장귀(鐵雲藏龜)》, 손이양(孫詒讓)의 《계문거례(契文擧例)》 등의 전서(專書)도 나오게 되었다. 서법상으로 연구하는 것도 이 무렵부터 성행하게 되었으며, 왕수(王樹)의 《허주제발(虛舟題跋)》 《죽운제발(竹雲題跋)》, 이광영(李光映)의 《관묘재금석문고략(觀妙齋金石文考略)》 등이 나왔고, 문자학적 연구는 청나라 말기가 되면서 획기적인 업적을 나타냈다.

오대징은 금문(金文)을 주요 자료로 한 한편, 석고문(石鼓文) ·화폐문 ·고도문(古陶文) 등을 이용하여 《설문(說文)》과 대조비정(對照比定)하여 1884년 《설문고류보》(14권)를 저술하였는데, 이것은 은 ·주 시대 금문의 해독에 거의 확실한 기초를 부여한 명저로서 현재에도 그 권위를 가지고 있다. 오대징은 쑤저우[蘇州] 사람으로 스승인 반조음(潘祖蔭) 및 손이양(孫詒讓)과 더불어 남방파의 금석학을 대표하는 사람이었지만, 북방파를 대표하는 학자로서는 산둥[山東]의 진개기 ·오식분 등이 있었다. 지방지의 편찬 때에 금석에 대한 항목을 첨부하는 것이 일반화된 것도 건륭시대 이후로서, 가경(嘉慶)시대에 필완(畢浣) ·완원(阮元) 공저의 《산좌금석지(山左金石志)》가 저술되었고, 《관중금석기(關中金石記)》 《중주금석기(中州金石記)》 등 청나라의 금석지지(金石地志)는 300여 종에 이르고 있다.

모든 석각을 시대별로 편찬하여 약설(略說)을 붙여놓은 왕창(王昶)의 《금석췌편(金石萃編)》과 그것을 증보한 육증상(陸增祥)의 《팔경실금석보정(八瓊室金石補正)》 둥의 저서도 나왔고, 목록만을 편찬한 것으로 손성연의 《환우방비록(寰宇訪碑錄)》, 목전손(繆荃孫)의 《예풍당금석문자목(藝風堂金石文字目)》 등이 있으며, 묘지 ·석경을 비롯하여 고전(古錢) ·인새(印璽) ·봉니(封泥) ·와당(瓦當) ·감경(鑑鏡)에 대한 저술도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청 말에는 석판 사진인쇄술이 채용되고 금석의 새로운 발견도 많아져 나진옥(羅振玉)은 도록 ·자료류를 계속하여 출판하였으며, 그의 제자 왕궈웨이[王國維]는 금문서체론 ·기형론 또는 고대 사료를 이용하여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근대에 중화민국이 되면서 왕궈웨이가 《은주제도론(殷周制度論)》을 저술해 낸 것을 비롯하여 상청줘[商承祚]는 《은허문자류편(殷墟文字類編)》을 저술하였고, 마헝[馬衡]의 명저 《중국금석학개요(中國金石學槪要)》 《봉니존진(封泥存眞)》이 나왔으며, 쑨하이포[孫海波]의 《갑골문편(甲骨文編)》, 융겅[容庚]의 《금석문편》 《한무량사화상고석(漢武梁祠畵像考釋)》 등도 출간되었고, 또한 이기(彛器) 연구의 저서도 많이 나왔다.

이 무렵 궈모뤄[郭沫若]는 《은주청동기명문연구(殷周靑銅器銘文硏究)》 《양주금문사대계(兩周金文辭大系)》 《양주금문사도록》 등 고동기(古銅器)의 제작 연대와 지역적 연구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궈모뤄도 금문의 편년적(編年的) 연구가 주체였으며, 기형학적 연구는 종속적이었다. 이 밖에 금석서목(金石書目)의 제요(提要)로서 톈스이[田士懿]의 《금석명저휘목(金石銘著彙目)》과 목록으로서 융위안[容瑗]의 《금석서록목(金石書錄目)》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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